초유의 치안감 인사 번복…'경찰 길들이기' vs '대통령 결재 패싱'
- 이대 기자
치안감 28명 인사 2시간 만에 번복…7명 보직 수정
치안감 인사 번복 사태 행안부와 경찰 진실게임 양상
행안부 장관 "대통령 결재 전에 경찰이 공지해 사달났다"
김창룡 경찰청장 "명단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
경찰 고위직 치안감 28명의 인사가 발표된 지 약 2시간 만에 7명의 보직이 바뀌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행안부는 경찰이 최종안이 아닌 중간버전을 발표해 벌어진 ‘단순 행정 착오’라고 해명했지만, ‘경찰 길들이기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은 22일 “경찰 인사안을 수정하거나 변경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경찰 길들이기 주장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고 밝혔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도 이날 “대통령은 밤 10시에 결재를 한번 밖에 하지 않았고, 기안 단계에 있는 것을 경찰청에서 공지한 것”이라며 “경찰청이 희한하게 대통령 결재가 나기 전에 먼저 공지해서 이 사달이 났다”고 말했다.

총경 이상 경찰 간부 인사는 경찰청장의 추천을 받아 행안부 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 같은 구조에서 대통령실과 행안부 장관의 설명대로라면 대통령 결재가 나기도 전에 경찰이 언론에 인사안을 공지한 것이 된다.
반면 김창룡 경찰청장은 “명단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고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 착오’라는 설명이다.
경찰 길들이기 차원에서 인사안 수정이든, 경찰의 ‘대통령 결재 패싱’이든 간에 치안감 인사 번복 사태는 향후 만만찮은 파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전날인 21일 오후 7시 15분쯤 경찰은 유재성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사이버수사국장을 국가수사본부 수사국장에 내정하는 등 치안감 28명의 인사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발표 2시간여 뒤 윤승영 충남경찰청 자치경찰부장을 국가수사본부 수사국장에 내정하는 것으로 바뀌는 등 모두 7명의 보직이 변경된 인사안을 다시 발표했다.
이번 인사는 행안부에 경찰을 통제할 수 있는 ‘경찰국’ 신설 등 행안부 경찰제도개선자문위의 권고안에 대해 경찰청이 시도경찰청장 등 지휘부 회의를 거쳐 우려 입장을 발표한 직후 이뤄졌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조지아 출장에서 귀국하자마자 기습적으로 이뤄진 인사였다.
이 때문에 대통령실과 행안부의 공식 해명에도 불구하고 경찰 내에선 김창룡 경찰청장 등 지휘부 화상회의에서 나온 발언이나 입장 등이 반영돼 인사안이 수정된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경찰 내부에선 초유의 경찰 고위 간부 인사안 번복 사태를 ‘경찰 길들이기’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김 청장 주재 회의에서 몇몇 인사는 “청장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 는 등의 강경 의견을 냈고, 이상민 장관에 대한 탄핵 언급도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휘부 회의 끝에 나온 입장문도 “경찰을 둘러싼 그간 역사적 교훈과, 현행 경찰법 정신에 비춰 적지 않은 우려를 표한다”며 완곡하지만 자문위 권고안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날 경찰 내부 게시판에는 “경찰이 정권 노비냐”는 등의 격한 글들도 올라왔다.
이에 따라 내달 23일 임기가 만료되는 김 청장이 향후 ‘항의’ 차원의 거취 표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다. 김 청장은 지휘관 회의에선 거취와 관련해선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직 변경된 대상자들이 김 청장 주재 지휘관 회의에서 강경발언을 한 인사들인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경찰 반발이 확산하는 가운데 행안부의 경찰제도개선자문위의 권고안이 발표된 직후 이뤄진 ‘기습 인사’라는 점에서 보면 행안부의 ‘경찰 통제’ 방안에 대한 경찰 지휘부 반발을 제압하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인사 때 경찰청 교통국장으로 내정됐다고 서울경찰청 자치경찰차장으로 바뀐 김학관 경찰청 기획조정관은 경무관 시절 문재인 정부 국정상황실 파견 경력이 있다.
이외에 보직 수정은 김준철 광주경찰청장이 당초 서울청 공공안전차장에서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으로, 정용근 충북청장이 중앙경찰학교장에서 경찰청 교통국장으로, 최주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과학수사관리관이 국가수사본부 사이버수사국장에서 국가수사본부 수사기획조정관으로 바뀌었다. 이명교 서울경찰청 자치경찰차장은 첫 명단에 없었으나 중앙경찰학교장으로, 김수영 경기남부 분당경찰서장은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에서 서울청 공공안전차장으로 발령안이 변경됐다.
치안감 인사에서 김도형 강원경찰청장은 경무관에서 승진한 뒤 곧바로 지방경찰청장에 임명됐다. 치안감 승진자는 지방청장이 아닌 본청 참모 보직을 받는게 통상적이다. 김 청장은 권성동 원내대표가 나온 강릉 명륜고 후배다.‘윤핵관’으로 알려진 여권 핵심 인사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