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페라 흥행사, 헨델 vs 월급쟁이 교회음악가, 바흐

뉴스버스1 2022. 7. 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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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 바흐&헨델(3)

바흐와 헨델을 날줄씨줄로 살펴보면 1685년 같은 해에 같은 나라 독일에서 태어났고, 같은 의사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 말고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다.

열심히 공부한 성실파 바흐는 그 당시 유행하던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공부하고 작곡했지만 기묘하게도 오페라는 단 한 곡도 작곡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간에서부터 교회합창까지 수많은 교회음악은 물론 기악작품들 면에서 불후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궁정과 교회가 그의 주무대였다. 반면 천부적인 재능에 약삭빠름까지 갖추고 있던 헨델은 사람들의 기분과 심리를 쥐고흔드는 오페라 등 극음악 또는 그에 준하는 음악에 능했다. 그의 주무대는 궁정과 교회보다는 대중들을 상대로 한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었다.    

영화 파리넬리중 오페라공연 장면

1597년 메디치 가문의 통치 아래 이탈리아 문화수도의 명성을 누리던 피렌체(Firenze)의 예술가모임 카메라타(Camerata)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오페라(Opera)는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유럽 전역의 오페라하우스의 모습들은 영화가 없던 시기 환상적인 오락이 당시 사람들을 얼마나 매료시켰는지 웅변하는 증거다. 16세기 말∼17세기 초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과 영웅의 이야기, 그리고 이를 재현하기 위해 동원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볼거리들은 귀족 후원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고, 나아가서는 통치하는 나라와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 경쟁으로까지 번졌다.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삶 즐긴 헨델

특히 헨델(1685∼1759)은 환상적인 오페라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젊어서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20살에 <알미라 Almira>(1705.1), <네로 Nero>(1705.2)를 시작으로 <플로린도 Florindo>, <다프네Daphne>(이상 1708.1)를 당시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 함부르크에서 공연하며 이미 예습을 거쳤다. 그는 유학지였던 피렌체에서 <로드리고 Rodrigo>(1707.10)에 이어 당시 가장 큰 극장이 있던 베네치아에서 <아그리피나 Agrippina>(1709.12)를 공연함으로써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의 포텐셜이 터진 것은 26세 젊은 나이로 처음 방문한 런던에서 선보였던 오페라 <리날도 Rinaldo>(1711.2.24 초연)의 성공이었다. 이 작품은 중세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기사문학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리날도 장군이 이슬람의 여마술사 아르미다에 의해 마법의 성에 갇힌 알미레나 공주를 구출해내는 일련의 과정과 바다의 요정 사이렌들의 유혹 장면, 그리고 영화 <파리넬리 Farinelli>에 나와 유명해진 알미레나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가 관객을 매혹시킨다. 퀸즈 씨어터의 무대에도 무려 11번이나 올랐다.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

런던에서의 성공을 확신한 헨델은 1717년 하노버 공이 영국 왕 조지 1세로 런던에 오기까지 4편의 오페라를 더 올렸다. 이 가운데 영웅의 모험담과 마법사가 나오는 환상 소재 오페라인 <테세오 Teseo>(1713.1)와 <가울라의 아마디지 Amadigi di Gaula>(1715.5)는 리날도의 성공을 이어주었다.

조지 1세의 보좌관 자리까지 차지한 헨델의 성공이 알려지면서, 대륙의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이 속속 진출하니 런던에서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유행이 일어났다. 그래서 장사가 되는 오페라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공연 수익도 얻기 위해 영국의 귀족들은 오페라단들을 만들었다. 

1719년 유럽 각지에서 가수와 관현악단이 모여 창립된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에는 헨델 외에도 조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oncini),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가 있었다. 헨델은 왕립음악원의 재력을 배경으로 카스트라토인 세네시노(Senesino),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Margherita Durastanti),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스카우트했다. 이 당시 헨델은 런던에서 오페라의 제왕이나 다름 없었다.

영국 작가 에드워드 덴트(1876∼1957)의 독설처럼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는 ‘무대의상을 입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였다. 헨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런던 시민들을 위해 공연됐는데, 의미를 알려주는 팜플렛도 자막도 없던 시절 청중의 주된 관심은 '어떤 가수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느냐'였다. 요즘으로 치면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만큼이나 비싼 몸값을 주고 데려온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라이벌 의식이 불꽃 튀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을 같이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왕립 음악원의 오페라 작곡가들이 등장시간이나 배역의 비중, 음역, 심지어 음표 수까지도 똑같이 맞춰야 했다. 이는 헨델 몰락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왕립음악원 시절(1720∼1734)에는 왕과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 역사 소재에 도덕적 주제의 오페라를 주로 쓰느라 흥행성적은 점차 떨어졌다. 이 시기에 쓰인 오늘날 헨델 최고 인기 오페라로는 로마의 위대한 영웅 시저를 그린 <줄리오 체사레 Giulio Cesare>(1724.2)가 있는데, 왕과 귀족 후원자들의 관심을 충족시켜야 했던 배경이 녹아들어 있다.

헨델 오페라의 정점은 역설적으로 그가 작곡가 겸 흥행주로서 최고의 위기를 맞이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잘나가던 왕립음악원은 폐쇄됐고(1734), 헨델의 장기였던 오페라 세리아의 인기는 바닥이었다. 여기에 영어 오페라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가 떠올랐다. 헨델은 ‘오를란도 삼부작’을 띄워 승부수를 던졌다. <오를란도 Orlando>(1733.1.27), <아리오단테 Ariodante<(1735.1.8),  <알치나 Alcina>(1735.4.16.)가 그것인데, 기사 오를란도와 이교도인 공주 안젤리카, 마녀 알치나 등이 나오는 환상과 모험, 사랑, 전쟁 이야기를 다루어 대중적 흥미를 잡아냈다. 

당시의 오페라는 경쟁적으로 빠르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음악과 비슷한 스토리가 많았다. 남의 것을 대놓고 표절하거나 자기 작품에 써먹었던 것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창작자들은 단타로 치고 빠지는 경향이 있었고, 작품에 대한 애착 역시 별로 없었다. 흥행의 결정적 요소인 가수나 극장주, 귀족들이 입맛에 따라 음악과 가사에 '감 놔라 배 놔라' 개입하는 바람에 제멋대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이런 지저분한 관행들은 자연히 오페라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며,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몰락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헨델은 다시 힘들여 왕립음악원을 재건하지만, 이 역시 반(反) 헨델파가 만든 귀족극단(Opera of the Nobility)에 밀려 문을 닫게 된다. 당시 국왕 조지 2세와 반목하던 왕세자 프레데릭의 주도로 1733년에 창립된 이 오페라단은 부왕의 왕립음악원과 경쟁하려 했다. 이 귀족극단은 음악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데다, 헨델의 가수와 대본작가들을 더 많은 돈으로 스카우트하며 진흙탕 싸움까지 벌였다. 

1735년 헨델은 런던의 여러 극장의 소유주이자 연출가였던 존 리치(John Rich)와 손잡고 오늘날 로얄 오페라 하우스가 된 코벤트 가든 극장(Covent Garden Theatre)을 중심으로 세 번째 오페라 단을 창립한다.

하지만 <거지의 오페라>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는 더 이상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페라 재건에 너무 힘을 쏟은 나머지 헨델은 1737년 쓰러지면서 오른손 손가락들에 마비가 왔다. 주변에선 헨델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헨델은 독일의 아헨(Aachen) 지방으로 휴양을 갔다온 후 빠르게 회복되었다. 1738년 발표되어 최후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오페라 <세르세 Xerxes>가 그런 환경에서 나왔다. 결국 1741년 <데이다미아 Deidamia>를 끝으로 오페라를 포기한다.

헨델은 오페라 장르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이후 오라토리오에 주력한다. 헨델은 총 49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중 6편은 악보가 남아있지 않다. 

헨델오페라 리날도중 리날도와 아르미다.

생활에 찌들리고, 신앙에 갇혀 살았던 바흐

반면 바흐의 경우는 자유분방하고 모험을 즐기는 헨델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23살에 결혼해 식솔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주, 작곡, 레슨, 지휘 등 평생을 산더미 같은 일에 치여 살았다. 앞편에서 언급한 것 처럼 뤼벡에서 북스테후데의 빛나는 후임 자리를 거절한 것은 10살 연상의 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당시 이미 한 살 위 6촌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1684~1720)와 연애중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2년 후 1707년에 바흐의 외사촌이 사망하며 남긴 약간의 유산에 기대어 결혼했다. 이후 바흐 나이 35살이 되도록 13년을 함께 살며,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Catharina Dorothea),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과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anuel)을 포함 일곱 자녀를 낳았다. 그중 셋은 돐을 넘기지 못했고 3남은 24살에 죽었다.

첫 아내와 사별 1년 후인 1721년 16살 연하의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와 재혼한 바흐는 3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둘 사이에 무려 13명의 자녀를 뒀지만, 30살을 넘긴 것은 그중 절반이 채 안되는 겨우 6명이었다. 그 중에는 나중에 런던을 방문한 꼬마 모차르트에게 교향곡의 기초를 가르친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이 있었다.

당시 음악가는 제후 등 귀족이나 대주교의 궁정에서 서열이 별로 높지 않았다. 집사장, 재단사, 요리사, 이발사, 마필관리사 등 필요불가결한 기능을 갖춘 이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음악가나 화가 등은 비로소 그 다음에 위치했다. 교회의 칸토르(Kantor 음악감독 겸 합창장)에게 주어지는 급여 역시 그 시대의 표준과 다를 바 없었다.

19세기 중반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하기 전까지 독일은 여러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 제후들이 다스리던 상태였고, 도시마다 부의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를 얻은 오페라 작곡가가 아닌바에야 음악가는 돈을 만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바흐는 평생 20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그중 11명이 장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열악한 위생과 의료상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9명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했던 비운의 가장이 바흐였다. 쾨텐(Cöthen)의 계몽군주였던 레오폴트(Leopold) 공작의 궁정악장으로 일하던 시절 바흐는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1723년 아들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대학이 없던 쾨텐을 떠나 대학도 있고, 제법 괜찮은 보수를 제시한 라이프치히(Leibzig)로 옮겼다.

자식들의 교육이 끝나면 라이프치히를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바흐는 이후 25년간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원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Thomaskirche)의 칸토르 자리에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받던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이 유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서부 독일의 부유한 도시에서 충분히 누리고 있는 상태였고, 랑에(Gottfried Lange) 시장이 두 번째 후보였던 바흐를 추천하면서 텔레만을 제치고 칸토르 자리에 부임하게 된다.

이미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엘교회 부속학교에서 배우던 10대 때부터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던 바흐는 자신을 음악가라기보다는 음악사역자로 인식했다. 그가 남긴 모든 악보의 말미에는 라틴어로 Soli Deo Gloria(오직 주님께만 영광을)이라는 그의 서명이 그의 신앙을 대변해준다.

신에게 다가서려는 마음을 담아 작곡한 방대한 분량의 교회음악들은 사명의 측면도 있었지만, 아울러 집안을 먹여살리고 자녀들의 교육비를 대야 했던 바흐의 직업적 측면의 산물이었다. 바흐는 루터파 교회와 엄격하고 보수적인 고용주 시의회의 요구에 따라 숨막히는 규율과 통제 속에 일해야 했다. 과묵하고 성실한 음악가였던 그는 군말 없이 작곡에 몰두해, 매주 예배에 사용할 새로운 칸타타를 포함한 곡들을 어김없이 생산해냈다. 

그러나 마지막 27년간 봉사했던 라이프치히 시당국과 교회는 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두 개의 합창단과 어린이합창단,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마태수난곡’(Matthäus Passion)의 연주를 들은 교회 당국자들은 칭찬은 커녕 오히려 바흐의 봉급을 깎아 버렸다. 경건해야 할 교회음악이 지나치게 웅장하고 교회의 예산을 한번에 너무 많이 써버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태수난곡은 바흐의 최고 역작으로 꼽힌다.

그는 여러 차례 급여를 인상해줄 것을 시의회에 요구했으나, 그의 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은 요구 횟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인상해주면서 추가적인 의무가 부과되는 게 보통이었다. 헌신적이고도 능력있는 아내 안나 막달레나가 무보수로 어마어마한 양의 악보를 사보해주지 않았다면, 그의 봉급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엔 넘볼 수 없는 음악사적 업적을 인정받은 바흐

오페라 흥행사 헨델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대미술과 기술, 화려한 의상과 소품이 동원된 오페라를 제작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장기였던 환상적인 이탈리아어 오페라가 인기를 잃자,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장르를 들고나와 기록적인 성공을 거뒀다. 반면 승부사 기질 대신 음악과 신앙 밖에 모르는 외곬수, 비타협적인 반항아 이미지가 강했던 바흐는 대규모 공연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고 당국과 교회에 치여 살았던 탓에 대중의 인기나 부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오늘날 바흐의 인기는 헨델을 멀리 뛰어넘어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말러와 비견되고 그의 음악사적 업적은 아무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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