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깊이 남은 과거를 꺼내 현재화하는 작가 - 문상미
심정택 칼럼니스트
전시 'Overflow',서울 방배동 갤러리지음에서 28일까지
여행이 슬프고 아픈 기억들을 소환할 때가 있다. 특히 그 기억들의 출발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생은 태엽시계 마냥 되돌릴 수도 적당히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생면 부지의 예술가를 처음 맞닥뜨려서 작품 몇 점 보고 작품 세계를 논하기는 막상 쉽지 않다. 아직 예술적 여행이 성숙기에 접어들지도 않았고 변곡점 또한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이 땅을 떠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살아온 작가이기에 떠나기 전 국내에 활동 흔적이 남아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작가와 작품에 대해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는 곧 또 이 땅을 떠나 삶과 예술의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한 유망 예술가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상미 작가와는 지난 13일 전시를 준비중인 서울 방배동 갤러리지음에서 처음 작품을 보았고, 인터뷰를 했다. 이 글은 필자가 짧게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온 밤 깨달은, '과거의 시간들이 슬프고 아팠다'는 감정의 이입이 문상미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공감에서 출발한다.
문상미의 예술 및 삶의 여정에서 주목한 곳은 이탈리아 만토바였다. 6년여 고군분투했던 미국 뉴욕 생활에서 돌아와 한국에 머물며 만난 인연과 이탈리아로 간 첫 기착지가 만토바이다.
만토바는 주세페 베르디의 3대 오페라인 ‘리골레토’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가 1832년에 쓴 희곡 ‘환락의 왕(Le Roi s’amuse)’을 오페라로 만든 것으로 원작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의 파리가 이탈리아의 만토바로 바뀌었고,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도 만토바 공으로 바뀌었다.
꼽추인 광대 리골레토는 딸 질다에게 성당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금지하고, 딸을 유혹하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하고 안심한다. 그러나 딸은 자신이 섬기는 난봉꾼 만토바 공에게 농락당하고 만다. 복수를 결심한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매수하는데, 아버지의 계획을 알아챈 딸은 변장한 자신의 몸을 자객의 칼에 내던진다. 죽어 가는 딸을 안은 채 리골레토는 절규하고, 멀리서 난봉꾼 만토바 공의 노래만 들려온다.
복수는 인간이 다룰 영역이 아님을 말해준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 비록 악인이더라도 - 응징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문상미는 만토바에서 130km 떨어진 밀라노에 거주하고 있다. 2019년 7월 주밀라노 한국 총영사관에서 Ruach를 전시 타이틀로 한 초대전을 가진바 있다.
문상미 작품의 특징인 재료적 미디엄(medium·용제)인 핸디코트는 작가가 미술 소품 제작 회사에 다니면서 접한 재료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미술은, '세트 디자인, 제작 등 모든 리얼리티의 구현'을 말한다.
핸디코트는 영상 예술뿐 아니라 조각과 회화의 양 영역에 걸친 재료이기도 하다. 문상미는 바탕색으로 아크릴과 핸디코트를 혼합하여 캔버스에 칠한다. 칼라가 더해져 부드러운 질감의 이 혼합재료는 캔버스 천과 합쳐지면 거친 질감으로 변화된다.
뉴욕 시절에 문상미와 인연을 맺게 된 기획자 김민희는 작가의 생활 환경 변화에 따라 작품이 변화하는 게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문상미는 스스로 고백한다. ‘잘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무엇이든 표현하는 게 좋다’고. 표현 행위란 어차피 카오스인 삶으로부터 로고스를 생성시키는 일이다. 그 녀는 뉴욕에 남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고단한 생활이 뒤따랐다.
작가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바탕과 대상이 큰 차이 없는 모노톤으로 표현한다. 도상들은 화폭 전체를 꽉 채우는 기하학적인 형태나 패턴 반복도 아니고 구도나 구성에서 조밀함도 중요시하지 않는 듯 보인다.
화폭의 적정한 지점에서 마치 곡식의 낱알 같은 형태는 방향이나 전체 이미지가 미리 계획되지 않았기에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아메바와 같은 원생동물이 커지듯 번져나가고 확장된다.
안료와 잘은 석채(금강석)를 섞어 반복해 덧칠하면 돌가루는 비즈처럼 반짝거린다. 재료의 중첩은 자연광 또는 인공조명의 기울기에 따라 미세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인터뷰 도중 작가는 "웬일인지 자신의 삶이 우여곡절이 많은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면서 스스로 감정에 겨워하기에 나는 "누구든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러한 자기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작품의 모티프는 하얀 국화 꽃 이파리에서 시작한다. 필자가 낱알의 형태로 본, 작가의 초기 작품의 도상은 모아지지 않고 흐트러진 국화 꽃 이파리들을 재현한 듯 보였다. 그 꽃 이파리가 진화한 낱알을 철심으로 새기듯 파내고 돌가루(석채)를 입혀 마치 깍지를 벗긴 알곡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보인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가 떠나온 곳에 남아있지 않다.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 과거를 조금씩 꺼내어 현재화한다. 작가가 자신과 떨어져 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갤러리지음은 필자가 이사를 와 산책하다 발견한 곳이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언니는 서울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동생은 홍콩에서 각각 갤러리 경영을 한다.
서울 갤러리지음에서의 문상미 작가 전시 <Overflow>는 7월 28일까지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