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성공 헨델 vs 죽음 후 르네상스 바흐
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1- 바흐&헨델(5)
헨델과 바흐는 동갑내기였지만 삶도 음악도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은 성격도 음악적 개성도 차이가 컸다. 바흐는 평생 독일을 벗어나지 않고 교회나 궁정음악을 했던 반면, 헨델은 일찍부터 타향인 대도시 런던에 정착하여 거기 몰려든 유럽 각지의 유명 음악가와 연주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부와 명예의 승리자가 되었다.
헨델은 그에 대해 쓴 여러 기록들을 보면 타고난 체력과 열정, 세 번이나 왕립음악원을 세울 만큼 강한 의지를 지닌 인간이었다. 새로 열린 하노버 왕가의 영국 왕 조지 1세의 보좌관 직함도 가졌을 만큼 왕의 총애와 흥행력에 음악성까지 더해졌으니, 비록 좌충우돌하기는 했지만 그의 인간적 성공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반면 바흐는 제법 성깔이 있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20명이나 낳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심에 따른 책임을 다하느라, 과묵했고 성실의 화신으로 보일 만큼 인내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바흐는 생전에도 그랬지만 사후에 금방 잊혀졌다가 몇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위대함이 재발견돼 평가가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완전히 바뀌었다.
헨델, 성공을 향한 의지의 화신
헨델은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업적은 차치하고 그 의지력과 굳은 음악적 신념만으로도 음악사에 남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가 왕립음악원을 세우고 오페라를 제작할 당시, 정치권과 연루된 협잡배들이나 당시에 잘 나가던 라이벌 작곡가들, 그를 시샘하던 귀족들 때문에 그는 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투쟁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상당한 다혈질로 급하고 과격한 성격 탓에 그의 적들과 논쟁하다 자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벌였다. 심지어는 상대를 죽이거나 자신이 다친 적은 없지만 결투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런 강인한 성격 덕분에 그는 누구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고, 정글과도 같았던 런던의 음악계에서도 가장 성공한 작곡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전의 헨델은 명예욕과 돈 욕심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적들도 많았다. 하노버에서 런던에 오페라 공연차 왔다가 눌러앉은 걸 괘씸히 여기던 하노버 공작이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는 바람에 낭패를 겪다가, <수상음악>으로 일거에 역전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이후에도 타고난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은 그를 자주 골치 아픈 처지에 빠뜨렸다.
하지만 그는 운이 억세게 좋은 건지,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지, 그때마다 훌륭한 음악성을 가진 작품을 내놓아 결국엔 곤경을 헤쳐나왔다. 이런 것이 그의 그림자라면, 밝은 면 역시 없지 않았다. 전회에 쓴 것처럼 고아들을 위해 <메시야>를 연주하고,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면서 여러 자선활동을 펼쳤다.
그는 늘 필요하다면 제법 큰 돈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환경에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사생활 관리도 철저해서 사생아에 관한 소문도 없었다. 실제 생활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귀부인들이나 여가수, 무용수들과 연관된 스캔들도 이상하리만치 없었다.
헨델의 연애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딱 하나다. 젊었을 때 함부르크에 있는 이발사의 딸을 좋아한 헨델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작곡 악보를 선물했다. 그리고선 그녀가 마음을 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헨델은 그녀가 아빠 일을 돕고있는 이발소를 찾아가 창밖에서 염탐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손님의 머리 손질을 한 다음 아버지에게 '헨델의 악보 몇 장만 찢어 주세요, 머리카락 쓸어 담게요' 라고 말하는 걸 들어버렸다. 분노한 그는 그녀를 포기했다. 아마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을 수 있다. 헨델이 대식가였던 것을 보면, 몰려오는 스트레스를 먹는 행위로 풀었을 수도 있다.
다혈질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사람을 쉽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인물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일면 착하고 털털한 성격도 지녔을 것으로 짐작된다.
46편이나 되는 이탈리아어 오페라를 작곡해 공연했지만 오늘날 헨델은 오라토리오의 최고봉으로 알려져있다. 총 25개에 달하는 영어 오라토리오와 그 이전 2개의 이탈리아어 작품을 남겼는데, <메시아> 이전의 작품도 9개나 된다. 1742년 4월 13일 부활절 자선음악회로 더블린에서 초연된 <메시아>는 헨델의 생전에만 34회나 공연되었고, 모차르트는 <메시아> 전곡을 자기 스타일로 다시 편곡한 버전을 남겼다.
1751년 실명 위기에 처한 헨델은 유명한 안과의사라고 스스로 소문을 내고 전 유럽을 다니던 존 테일러에게 수술을 받지만, 결국 시력을 잃고 말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런던 청중들에게 들려졌고, 그들은 위대한 작곡가를 잊지 않았다. 헨델의 장례식 날 모든 영국 국민들이 슬퍼했으며 애도의 인파가 3,000명이 넘게 몰렸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안치되었다.
헨델의 작품들은 사후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헨델의 연구자들은 영국에 풍부하게 보존된 악보 및 자료들을 별 어려움 없이 쓸 수 있었다.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헨델의 작곡기법을 응용했는데, 특히 고전파 시기의 위대한 작곡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헨델의 작곡기법을 본받아 명징한 멜로디와 선명한 화음, 뛰어난 대위법을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 작품 등에는 헨델식의 대위법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전세계에서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메시아> 등 오라토리오와는 달리 헨델의 오페라들은 2세기 넘게 묻혀 있었다. 그러다 원전악기 시대 연주의 열풍이 1980년대 이후 기악작품들에서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들을 재발굴 연주하는 유행으로 옮겨붙으면서야 부활하기 시작했다.
바흐 사후 1세기에 '바흐 르네상스'의 도래
라이프치히라는 도시 한구석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엄청난 역사적인 대곡들을 작곡했던 바흐는 현재는 성 토마스교회에 묻혀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덤조차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았을 정도로 바흐는 소리 소문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방대한 작품들은 마지막에 봉직했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 음악학교의 창고에 방치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동안 바흐의 음악은 작곡가나 악보 수집가 등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을 발표하면서 사후 50여년 만에 바흐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바흐 르네상스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1827년 베토벤이 사망했을 때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가 작성한 추도문에 베토벤 이전의 위대한 음악가로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를 들고있는 걸 보면 이미 바흐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수집되고 출판되었으며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었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이 <마태 수난곡(Mattäuspassion)>을 복원 연주하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집에서 하인이 사온 고기의 포장지가 바로 <마태수난곡> 악보인 것을 알고, 멘델스존이 푸줏간을 찾아가 바흐 악보를 몽땅 사들여 복원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카펠마이스터가 된 것은 1835년이니, 복원 시점과 상당한 시차가 있는 점으로 보면 말 그대로 일화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또다른 주장에 의하면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를 징아카데미를 지휘해 초연했던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Zelter)가, '베를린의 바흐‘로 불리던 C.P.E.(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푈샤우(Föhlschau)에게 넘긴 <마태수난곡>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다르다. 독일의 떠오르는 신흥 강자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Friedrich)는 꽤 수준 높은 플루트 연주자였고, 플루트 협주곡도 작곡했다. 당시 위대한 바흐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바흐의 둘째 아들 C.P.E 바흐를 궁정악사로 고용했는데, C.P.E 바흐가 아들을 낳게 되자 손자를 보러 온 바흐를 당연하게 궁정으로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제시한 주제 선율에 맞춰 바흐가 작곡한 곡이 최후의 걸작이자 바로크 대위법의 집대성인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 아말리아(Amalia) 공주 역시 음악에 심취해 바흐를 존경했다. 끝까지 비혼이던 그녀는 음악 애호가 모임인 '베를린 징 아카데미(Berlin Sing-Akademie)'에 열성적이었다. 이 베를린 징아카데미에는 C.P.E 바흐가 활약하고 있었다.
베를린에 정착한 유대인의 양대 부호 멘델스존 가문과 잇치히(Itzig) 가문이 베를린 징 아카데미에 합류한다. 잇치히 가문을 외가로 뒀던 프로멧 구겐하임(Fromet Gugenheim)은 곱사등 장애인이었던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제스(Moses)와 결혼하고, 나중에 음악신동 외손자에게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를 선물로 준다. 14살 생일에 선물로 악보를 받은 이 손자가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장성한 후 <마태수난곡>을 지휘하며 오래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이 다시 주목받게 된다. 멘델스존은 단번에 스타 음악가로 발돋움했고, 바흐 르네상스에 불을 질렀다.
마침 1829년은 마태수난곡이 초연된 지 100주년었다.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에서는 바흐의 스테인드글라스 옆쪽에 멘델스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한편, 바흐의 큰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역시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활약하고, 아말리아 공주의 후원을 받았다. 아말리아 공주는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엄청난 양의 바흐 악보를 확보해 징아카데미에 보관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약탈한 뒤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수십년간 학자들의 추적 끝에 지난 2000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이 악보들이 발굴되어 베를린으로 반환되었다.
바흐 사후 칼 필립 엠마누엘 등 그의 아들들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아말리아 공주가 후원한 바흐 음악의 출판 및 보급에 대한 노력은 다음 세대인 고전파의 작곡가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예를 들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에 나타나는 대위법과 합창법 등의 작곡기법들은 상당 부분 바흐(와 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20대 중반에 빈으로 이주한 후, 반 슈비텐 (Van Switten 1733~1803) 남작을 통해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이후 에벌린의 대위법 수준을 바흐, 헨델과 비교·비평하는 내용의 편지를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쓴 일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음악이 잊혀진 것은 고전파 양식이 대세가 되면서 바로크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관심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바흐는 동시대에 살았던 비발디, 텔레만, 라모, 스카를라티 등 바로크 시기의 다른 스타 작곡가에 비하면 일찍 재평가된 편이다.
바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듣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바흐가 작곡한 많은 음악들이 분실되었거나 불완전하게 복원된 상태다. 종종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악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첼로의 성서로 불리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889년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가 음악학교 학생 시절이던 23살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어느 고서점에서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노이마이스터 오르간 코랄’(Neumeister Chorales)들은 1985년에야 미국의 예일대학교 고서적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어 BWV(바흐 작품 번호)가 추가되었다. 이처럼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 발굴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또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바흐 르네상스는 독일을 넘어 전 유럽적인 현상이 됐다. 바흐 탄생 300주년과 서거 250주년을 거치며 아직도 위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잊혀졌던 헨델의 오페라들도 바로크 오페라 복원 열풍에 힘입어 악보가 남아있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1980년대 이후 복원 공연되었다. 같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지만 두 사람의 음악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바흐의 음악은 절제된 규칙 속에서 영혼을 울리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깊이있는 음악으로 평가 받는다. 헨델의 오페라 음악들은, 그가 누렸던 화려한 삶과 인기처럼 매력적이고 감각적이어서 귀에 쉽게 들어오고 쉽게 친숙해진다.
바흐의 음악이 담백하고 건강한 홈메이드 음식으로, 헨델의 음악은 양념이 많이 들어간 외식으로 비유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하지만 음악이란 본디 감상자의 취향에 따라 골라듣는 것일 뿐, 평론가의 평론이 감상에 영향을 주는 일은 별로 없다. 바로크 음악은 이렇게 상반된 두 거장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고, 뒤를 이은 고전파 음악가들에게 유산이 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