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을 사랑한 청년 군인 문상길·손선호의 항거
김준혁 객원기자(한신대 교수)
제주 4.3항쟁의 시작과 학살의 비극
사형장의 두 청년 군인
어느덧 4월이 왔다.
붉은 진달래 한라산에 가득하고, 노란 유채는 제주의 온 들녘에 가득하다.
맑디 맑은 제주 봄하늘은 4월만 되면 눈물의 하늘로 바뀐다.
4월 제주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두 청년이 사형장에 서 있다.
두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다. 군복을 입고 있는 두 청년은 이제 23살과 20살이다. 이 청년들은 죽음이 눈앞에 있음에도 태연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중 23살의 청년은 문상길 중위이고, 또 한 청년은 20살의 손선호 하사다. 이 젊디 젊은 청년들이 왜 같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것일까?
두 눈이 가리워진 문상길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스물 세 살을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총성이 울리고 이 두 젊은 군인들은 고개를 떨구고 이 세상의 생을 마감한다. 이날은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45분이었다.
제주도민의 단독선거 반대 의지
문상길과 손선호가 죽음에 이르게 된 4.3항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제주도로 6만여 명이 귀환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일제에 항쟁하던 이들이 역으로 도피한 곳이 일본이었다. 일본 땅에서 가장 은밀하게 숨어지낼 수 있었던 곳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나가사키였다. 이곳은 일본 내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아닌 이주민들에 대해선 특별히 신원조회를 하지 않아 제주에서 피해 온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서 거주를 하였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온 사람들은 일본에서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 사회주의를 공부한 이들도 꽤나 되었다. 해방 이후 제주로 돌아온 사람들은 더 이상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나라를 꿈꾸고 더 나아가 신탁통치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염원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청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라의 운명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단체제로 가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통일국가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38선을 가운데로 하여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와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정권으로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과 싸운 것이 분단된 국가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데, 외세인 미국이 분단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에 깨어있는 제주도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은 미군정청이 추진하는 5.10일 남한만의 제헌국회를 만들기 위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자 하였다. 특히 미군정청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을 제주 군정경찰로 중용하여 치안을 맡기자 제주도민들은 미군정청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제주도민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의지는 미군정청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 집단인 한민당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들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단독 정부를 만들어 한반도 남쪽을 친미국가로 만드는데 문제는 없겠지만 전체적인 모양새에 흠집이 나고, 제주의 단독정부 반대 투쟁이 육지로 전파되어 전국이 5.10 단독선거를 반대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미군정청이 파악할 때 3.8선 남쪽이 비록 미군정청이 장악하고 친일파 출신들이 경찰과 군대에 상당한 인력이 들어가 미군정청을 돕고 있어도 사회주의자인 남로당 당원들이 여기저기 은밀하게 숨어 들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의 진보적 도민들의 단독선거 반대는 미군정청과 이승만에겐 반길일이 아니었다.
3.1운동 기념식 참사
이러한 상황속에서 1948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 앞 마당에서 3.1운동 3주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중에 4.3항쟁의 도화선이 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갓난 아기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치인 것이다.
당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갓난 아이가 치였는데, 해당 경관이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시위 군중들은 기마 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
이 참사에 대하여 미군정청과 경찰은 사과를 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군정청의 담화문 제1항은 "제주감찰청 관내 제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제반 사정으로 보아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이라고 선언하였다.
미군정청은 제주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이문규 순경의 행위에 대하여 "무사려(無思慮)한 행동"이므로 행정처분에 처해야 한다고 하면서, 제주경찰서가 벌인 민간인 살상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건의 책임을 일선 경찰관 1명에게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를 하였다.

4.3항쟁의 시작
미군정청의 정당방위라는 담화에 제주도민들은 격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3.1발포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제주도는 제주 도민들에 대한 학대가 있을 때 어느 시대이건 항거를 하였다. 조선 말기에 서양 선교사들의 오만과 제주 도민에 대한 학대로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이 있었다. 민란이 일어날 때 두령이 되는 장두(將頭)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제주도의 전통임에도 의기 가득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민란의 장두가 되어 죽음에 임했다.
이처럼 제주는 육지의 그 어떤 지역과 다르게 그들만의 항거가 존재했다. 그 항거가 해방 이후 미군정청과 경찰에 의한 탄압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다. 미군정청은 총파업에 강경 대응 하였다.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전원 외지 사람들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 집단인 서북청년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전개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3.8선 북쪽에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던 젊은이들과 지주 출신의 자제들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들은 너무도 강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미군정청은 이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군정청과 경찰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폭력적 일을 서북청년단이 나서서 해결하였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반공주의 목사들이 서북청년단을 비호하고, 이들은 그들의 지원에 힘입으며 반공 국가 만들기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평범한 국민들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일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로 내려온 것이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한달 만에 500여 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했다. 1948년 3월에는 검거된 청년 세 명이 일선 지서에서 고문과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들끓었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 세력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 촉구 등을 내건 무장 투쟁을 결정하였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세력이 많은 인원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분노를 느낀 제주도민들이 적극 참여하여 무장대의 규모는 적지 않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회,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하였다. 새로운 민족 동란(動亂)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정청은 더 이상 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제주도민의 무장 투쟁을 막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모슬포에 있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부를 설치하고, 4월 10일 부산에 있는 제5연대 2대대를 제주에 파견하였다.

제주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인 김익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학병으로 끌려갔던 군인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학병 출신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반일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익렬 연대장도 친일파 성향의 군인이 아니었다. 김익렬은 제주도민의 항거를 보니 남로당 당원 중심이 아니라 너무도 억울해서 총과 죽창을 들은 평범한 제주의 백성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동란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장대의 사령관인 김달삼과 단 둘이서 만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김달삼은 김익렬을 자신들의 진지로 오라고 하였다. 김익렬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남로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가서 협상을 하였다. 그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김익렬은 자신이 책임자로서 남로당 무장대를 처벌하지 않고, 주요 지휘부를 몰래 일본으로 밀항시켜주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공표하고자 하였다.
박진경 부대의 잔인한 학살
그러나 이것은 미군정청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청은 제주도 무장대를 강력하게 탄압하여 육지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4월 29일 미군정청 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협상을 깨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오라리 마을’ 전체를 불지르는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군정청은 이 방화가 남로당 무장대가 저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방화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 방화 사건을 빌미로 평화협상은 결렬되었다. 김익렬은 오라리를 습격한 것이 경찰들의 소행임을 언급하며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했지만,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에게 좌익이라고 매도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군정청은 제9연대장을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김익렬에서 강경 진압 방침을 내세우는 박진경으로 교체하였다. 박진경은 일제강점기부터 철저한 친일파였다. 박진경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대정익찬회’란 친일 기구의 고위직을 맡았다. 그래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유학이었다. 이는 그의 집안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박진경은 28살의 나이에 중령으로 연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박진경은 강경한 진압 작전을 펼쳐 제주도민 수천여 명을 무차별 체포하였다. 그가 부임한 지 한 달 열흘만(1948년 5월 6일 ~ 6월 18일)에 포로만 6,000여 명에 달했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범한 제주도민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박진경의 공포스런 체포 작전으로 인하여 제주도민은 더욱 깊은 산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4.3항쟁을 그린 영화 ‘지슬’은 바로 이러한 체포 작전으로 한라산으로 피해 들어간 제주도민의 슬픈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박진경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제주도민들은 군인과 경찰을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상길과 손선호의 박진경 살해
박진경은 사격연습을 한다고 마을의 소와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고, 무장대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무장대가 없으면 총살하여 죽였다. 이렇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박진경은 무장대에 대한 체포와 사살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6월 17일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박진경은 승진 당일 요정인 옥성정에서 축하연을 마치고 돌아와 숙소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때 박진경의 제주도민 학살에 분노를 느끼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막사로 들어가 총을 발사해 살해하고 말았다.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실제 이들이 남로당원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오늘날 대한민국 군대와 같은 국방경비대에 상당수 남로당원이 군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문상길과 손선호가 남로당원으로서 박진경을 죽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해방 이후 새로운 자주국가 건설을 꿈꾸기 위해 군대에 헌신한 선한 젊은 군인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은 박진경을 살해하고 도망가지 않았다. 손선호 하사의 주장대로 30만 제주도민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도망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재판과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48년 8월 14일 선거 공판에서 문상길은 최후진술을 하였다. "우리는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해주기를 부탁한다.“
4.3항쟁의 슬픔
결국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주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승만은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 무장대(4.3투쟁)를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제주도민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특별명령을 내렸으니 군경의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을 더욱 커져 나갔다.
그 결과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되었고, 160여 개 마을이 참화를 입었다. 이재민이 전 제주 인구의 1/3인 9만7,000여명이나 되었다. 이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연좌제로 인하여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다. 4.3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그러다가 1989년 4월 3일 처음으로 제주 탑동에서 위령제가 펼쳐졌다. 대학 4학년 때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갔다가 현장에서 위령제를 참가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4.3항쟁을 북한에 의한 지령이라고 한다. 너무나 기가 막히다. 아마도 이는 윤석열 정부의 인식일 수 있다. 제주도민을 또 다시 모욕하는 것이다. 이 모욕이 다시 부메랑이 되어 그들의 가슴에 꼿힐 수 있다.

문상길과 손선호!
23살, 20살의 젊은 청년.
이들의 가슴 아픈 항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이 난다.
다시 4월이 시작된다.
제주의 4월은 푸르고 노랗고 빨갛고 아름답지만 너무도 슬프다.
제주에 가서 4.3 영혼들을 만나 위로를 드리고 싶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