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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울메이트를 만난 '바흐' vs 풍요 속의 빈곤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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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1- 바흐&헨델(4)

겨우 25살의 나이에 궁정악장의 자리에 올라 젊어서 명예를 얻었고, 30살이 되기도 전에 오페라 <리날도>의 성공으로 부를 누리게 된 헨델은 조지 1세의 신임을 얻어 영국 국왕의 보좌관이라는 정치적 영향력까지 누렸다. 그 반면, 가난한 음악가 바흐는 쾨텐의 영주 레오폴트의 궁정에서 일하던 짧은 시간 외에는 늘 박봉에 시달리며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국왕이 아닌 제후, 루터파 교회와 라이프치히 시의회 등은 당시의 사회계급상 재단사, 요리사, 이발사, 마필관리사보다도 낮았던 음악가에게 그리 높은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다는 사회적 통념을 바흐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바흐가 헨델보다 승리자였다. 바흐는 평생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둘 다 사랑했던 사람과 했으며, 특히 두 번째는 바흐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라고 할 만큼 그에게 완벽한 아내였다. 헨델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으며, 자손에서도 많은 유명 음악가를 남긴 바흐와는 달리, 가문의 대는 끊어졌다. 그 대신 런던의 고아들에게 헨델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바흐 가족음악회 동판화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랑의 승리자 바흐

1706년 뤼네부르크 성 마하엘교회 부속 음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갓 졸업한 18살의 가난한 음악가 청년의 첫 직장은 조그만 도시 아른슈타트(Arnstadt)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교회의 합창대장과 전속작곡가를 겸한 자리였는데, 깐깐하고 엄격한 연습 탓에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성가대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한 살 많은 사촌 누나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1684~1720)를 성가대석에 앉혀 노래하게 한 사건으로 교회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여성은 루터교회의 성가대석에 앉을 수 없었고,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는 소년합창이 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당시 바흐는 마리아 바르바라와 연애중이었다.

그러잖아도 뤼벡의 북스테후데를 방문하면서 4주짜리 휴가를 제멋대로 4개월로 늘려버린 바흐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아른슈타트 교회 성직회의가 이 사건을 문제 삼자, 바흐는 이듬해인 1707년 아른슈타트를 떠나 뮐하우젠(Mühlhausen)으로 옮기게 된다. 

바흐는 새 직장이 생기고 마침 바흐의 외삼촌이 사망하며 남긴 약간의 유산이 들어오자 바로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13년간 7명의 자녀를 낳는다. 이중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과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anuel)은 후대에 이름을 남긴 음악가들이었다. 총 일곱 자녀를 마리아 바르바라에게서 얻었는데, 그중 셋은 돐을 넘기지 못했고 3남은 24살에 바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록을 보면 마리아 바르바라는 그저 평범한 젊은 주부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소프라노이기는 했으나, 미모도 능력도 성격도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치게 경건주의적인 뮐하우젠 교회에서의 근무는 바흐에게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지만, 바흐는 이 기간 오르간음악에 매진한다. 

1년만에 바흐는 다시 직장을 옮겨 작센(Sachsen)의 선제후 바이마르(Weimar) 공의 궁정 오르가니스트가 되면서 바이마르로 이사를 했고 10년간 여기 머무르며 오르간 음악의 걸작들을 생산해낸다. 그런데 영주 레오폴트(Leopold)와 조카 사이의 갈등상황에서 기대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꿈을 이루지 못한 바흐는 세력을 확대하려던 조카의 주선으로 이직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만 영주에게 새어들어가는 바람에 바흐는 한 달 동안이나 감옥에 갇혔다가 영주의 분노가 풀린 다음에야 석방되었다. 

10년만인 1718년 바흐는 드디어 바이마르를 떠나 쾨텐(Cöthen)으로 옮겨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젊은 제후 다른 레오폴트(Leopold)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다. 이제야 조금 편하게 살게 되나 했는데, 그동안의 고생에 지쳤는지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1720년 사망한다. 이때 바흐는 주군인 레오폴트를 수행해 연주하러 갔던 상태였다. 급보를 받고 돌아와보니 전염병 의심 때문에 이미 장례를 마치고 매장까지 끝난 상태라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그는 밀려드는 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혼자 도맡아 하느라 지쳐서 재혼을 추진한다.

영화 안나 막달레나의 연대기
 

다음해인 1721년 바흐는 16살 연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Wilcke 1701~ 1760)와 재혼한다. 궁정 트럼펫 연주자의 딸이었던 안나 막달레나는 노래 뿐 아니라 사보에도 능했고 대위법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데, 갓 20살의 청춘에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존경하는 바흐 선생의 청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상당한 미모로 다른 청혼들도 나름 여럿 있었던 안나의 결혼 조건은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바흐는 이 결혼의 성사가 너무 기쁜 나머지, 연봉의 절반 가까이를 결혼식 피로연에 마실 와인의 구매에 써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안나 막달레나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남편의 악보를 필사했는데, 어찌나 남편의 필체와 비슷했는지 후대의 전문가들조차 이것이 바흐의 친필 악보인지 아니면 안나 막달레나의 사보 악보인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는 안나의 입장에서 본 바흐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걸작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악보는 안나가 사보한 것이다. 젊어서부터 오르간의 명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바흐는 즉흥연주에 능해서 교회 예배의 오르간 전주와 후주에 자주 즉흥연주를 했는데, 악보를 남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의 즉흥연주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악보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도 했을 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발휘했다.   

1723년 라이프치히로 이사한 후에도 안나 막달레나의 음악활동은 계속되었다. 안나는 음악가 가문의 안주인답게 자식들의 기초 음악교육에도 참여해 당시의 곡들 몇 개를 편곡해 ‘음악수첩’을 만들었다. 바흐 역시 이런 아내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1722년과 1725년에 소곡집을 선물했는데, 그것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음악수첩>이다. 그중 미뉴에트는 가사가 붙여져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라는 팝송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모음곡> 역시 안나 막달레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안나 막달레나는 자신이 만든 ‘음악수첩’도 활용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아이들이 함께 연주하는 가족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여기에는 안나 막달레나와 바흐도 함께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으로 참여했다. 안나 막달레나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바흐의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다. 밖에서 일에 지친 채 돌아온 바흐에게 가족음악회는 소박한 음악적 휴식을 제공했고, 음악가 가문을 이어가는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 가족음악회에는 바흐와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도 즐겨 찾았고, 라이프치히 전체에 소문이 나서 가끔 바흐와 대립하던 시의회 의원들도 찾아왔다고 한다.

바흐는 작곡과 교육, 연주에 바빠서 거의 육아에 보탬이 안되는 사이, 안나는 자신과 10살도 차이가 안나는 장녀를 포함한 전처의 자식들을 정성기울여 보살폈다. 29년 동안 안나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결혼생활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임신 상태로 있었을 만큼 부부의 사랑은 깊었다. 다만 절반 이상이 10살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당시의 열악한 위생과 전염병에 취약한 의료 환경 탓이다. 

안나 막달레나의 친필 무반주 첼로모음곡 악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 바흐가 죽은 후 안나 막달레나의 삶은 평온하지 못했다. 마리아 바르바라가 낳은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장성한 후에는 자신들의 생모 대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안나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750년 바흐가 사망한 후 전처와 후처의 소생들 사이에 유산상속 분쟁이 벌어져 각자 뿔뿔이 흩어져버리면서, 안나는 아직 어린 딸 둘을 떠맡게 된다.

이후 다른 자녀들이 돌보지 않는 바람에 생활고를 겪다가 마지막에는 시당국의 자선구제에 의존해 살다가 만 58세로 쓸쓸히 죽는데, 시 당국의 쥐꼬리만 한 보조금으로 빈민장례를 치러야 했다. 10년 먼저 타계한 바흐가 알았다면 펄쩍 뛸 일이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이 그를 잊어갈 때 이미 바흐 음악의 위대성과 불멸성을 간파하고 있던 안나 막달레나는 자신의 책이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을 예견하고 <내 남편 바흐>라는 책을 썼다. 안나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아 오늘날 바흐 연구가들 뿐 아니라 바흐 음악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바흐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생생한 증언들이 수록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다. 

평생 독신, 그러나 런던 고아들의 아버지 헨델

반면, 헨델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1711년 오페라 <리날도>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런던에서 오페라 세리아 유행이 일어나면서 귀족들을 주축으로 오페라단들이 창립되고 1719년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이 설립되었다. 헨델은 산하에 전속 오페라 작곡가로 헨델, 보논치니, 아리오스티를 거느렸다. 헨델은 왕립음악원의 재력으로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가수들을 스카우트해온다. <리날도>가 성공했을 때 헨델의 나이는 경우 26살, 젊고 재능있고 돈까지 많은 그는 런던 사교계의 빛나는 별이 되었다.

당시의 사교계는 부부동반 모임이 아닌 경우 대개는 고급 매춘부들이 동석하곤 했다. 헨델은 귀부인이나 오페라 여가수와 무용수, 사교계의 꽃들에게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페라단의 후원자들을 만나는 경우는 접대성으로 오페라단의 여가수, 합창단원, 무용수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헨델은 작곡가이자 오페라단 단장으로 그러한 행사가 적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바흐와 달리 친화력도 높고 인간관계에 대한 센스 역시 모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문제였다. 이탈리아에서 스카우트해온 소프라노 쿠초니(Cuzzoni)와 보르도니(Bordoni)는 지나친 경쟁 의식으로 같은 오페라에 출연하는 경우 작곡가들에게 등장시간이나 배역의 비중, 음역 심지어 음표의 갯수까지도 똑같이 맞추기를 요구했다. 당시 런던의 오페라 시장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 오페라가 유행하는 상황이었고 런던 청중에게 오페라는 무대장치와 의상, 연기가 있는 콘서트에 불과했다. 두 여자 때문에 엉망이 된 오페라에 덤으로 열성팬까지 두 패거리로 나뉘어서 심심하면 싸워댔다. 결국 둘은 오페라 공연도중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는 해프닝을 벌였는데, 하필이면 거기 캐롤라인 왕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던지라 문제가 커져 왕립음악원의 오페라 공연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이틈을 타서 가사가 영어여서 청중들이 모두 알아듣는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등장한다. 1728년 존 게이(John Gay)의 대본에 페푸쉬(Johann Christoph Pepush)가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을 모은 코미디 오페라로 상류계급의 귀족들이나 정치가들을 풍자하며 헨델의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62회나 공연되는 등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어 헨델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국 제1차 왕립음악원은 국왕의 후광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고 만다. 

헨델은 절치부심 끝에 다시 2차 왕립음악원을 창립하며 이탈리아에서 새로 주역 소프라노를 영입해온다. 이렇게 런던에 온 안나 스트라다(Anna Strada)는 온갖 풍파 속에도 끝까지 헨델의 편을 들며 이후 헨델의 거의 모든 오페라 주역을 도맡는다. 뚱뚱하고 못 생긴 외모가 아니었으면, 헨델과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1734년 2차 왕립음악원도 실패로 돌아가자 코벤트가든을 중심으로 한 세 번째 오페라단을 창단했지만 역시 대세를 돌이키지는 못한다.  

헨델 메시야 초판본 악보 표지

헨델은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오페라 대신 오라토리오(Oratorio)라는 연기나 무대 장치 등을 빼고 진행되는 새로운 음악극 장르를 만들어냈다. 헨델은 청중이 알아듣도록 가사도 영어로 쓰고, 모두 잘 알고 있는성경 속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대표작이 익히 아는 <메시아(Messiah)>다.

이 즈음 헨델은 토마스 코람(Thomas Coram 1668~1751)과 알게 되는데, 그는 식민지에서 조선업으로 큰 돈을 벌어 런던에 들아왔다. 코람은 어느 날 런던 시내를 걷다가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고아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국왕에게 17년 동안이나 고아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서한을 계속 보냈다. 코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모금전시회가 열리는 등 호응이 늘어나자 1739년 런던에 영국 최초의 고아원(the London Foundling Hospital in Lamb's Conduit Fields, Bloomsbury)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빈민들이 너도나도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바람에 곧 재정의 어려움이 찾아왔다.

헨델은 24일만에 3부 54곡으로 구성된 <메시아> 전곡을 완성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메시아>로 얻은 수익은 조금도 나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때마침 아일랜드 총독이 더블린 초청공연을 제안했다. 헨델은 더블린으로 옮겨 9개월여 머무르면서 <메시아>를 포함해 수차례 연주회를 연다. 런던을 제치고 더블린이 <메시아>’ 초연의 영예를 차지한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피셤블 가문 저택의 대음악회장에서 24명의 합창단과 솔리스트가 소박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노래한 <메시아>는 초연부터 대성공을 거두었다. 헨델은 부활절과 성탄절이면 반드시 <메시아>를 공연해 수익금을 고아원에 기부했다. 

이후 헨델은 고아원장에 임명되기도 할 정도로 고아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고아들을 위한 병원을 건립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메시아>를 지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고아원에 기부하는 비용은 줄이지 않았다. 1758년 그가 안과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는 고아원의 원아들이 찾아와 조문을 했다. 고아원의 이사들은 국왕에게 헨델의 사망으로 고아원의 운영이 많이 어려우니 왕실에서 보조금을 지급해달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헨델은 충분히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 사생아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적어도 '내가 헨델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나타난 경우는 없었다. 평생 독신이었던 헨델은 20명의 자녀를 생산한 바흐에 비하면 직접 피를 내려받은 자식은 하나도 없었지만, 상당 기간 런던 모든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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