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한신대 교수
기녀들의 망곡례(望哭禮)
폐하! 폐하!
이 나라를 어찌 하시고 이리 억울하게 붕어하셨습니까?
저 간악한 일본과 어찌 싸워야 하는 것인가요?
1919년 3월 27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고종황제 국장례(國葬禮의) 하나인 ‘망곡(望哭)’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나무 비녀를 꽂고 나막신을 신은 기녀들이 대성 통곡을 하며 망곡례에 참가하고 있었다.
화려한 치장을 모두 풀어 던지고 하얀 소복을 입고,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기녀들에게 망곡례에 참가한 모든 백성들이 함께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수원의 기녀들이었다. 고종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한양을 떠나 수원으로 전해졌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수원의기녀들은 화려한 의상을 벗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옥비녀 대신 머리에 나뭇가지를 꽂고, 예쁜 가죽신 대신 나막신을 신었다. 그리고 전국 최고로 활성화되어 있던 기생집의 문을 닫았다. 나랏님이 죽었는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녀들의 생각이었다.
이때 고종이 단순히 노환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되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아버지 고종의 시신을 보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평소 입던 옷이 맞지 않았고, 몸통 안에 검은색 반점과 줄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독살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퍼졌다.
상궁들이 준 커피에 독을 탔다는 소문도 강하게 돌았다. 실제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커피를 준 상궁들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사형을 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고종의 독살설을 전국에 더욱 확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수원의 기녀들은 강하게 분노하였고, 그 분노는 고종에 대한 애절한 울음으로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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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만세 투쟁
고종황제의 국장(國葬) 3일 전인 1919년 3월 1일 오후에 수원 화성의 대표적 시설물인 용두각(방화수류정)에 수백 명이 모였다.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백성들은 이리저리 피하는 척 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은 두려워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백성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만세 소리를 듣고, 수원의 여기저기서 모여든 군중이 용두각 일대에 수천 명이 되었다.
이날의 독립 만세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 변혁의 큰 흐름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1917년 11월에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식민지 국가를 모두 해방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식민지 국가가 고통받기 때문에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식민지를 해방함으로써 그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실제 의도였다.
어쨌든 미국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1차 세계대전 패전국들의 식민지 국가들은 해방이 되었지만, 승전국인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해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꿈을 꾼 대한인들은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결합하여 강력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와중에 고종황제의 죽음은 조선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 소속 기녀(妓女)들의 만세 투쟁
3월 1일 마침내 민족대표들의 치밀한 준비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날 점심 즈음에 서울 태화관과 파고다 공원의 본격적인 만세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때와 동시에 전국 6개 도시에서 서울과 거의 같은 시간대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 만세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중 한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3월 1일 오후에 용두각에서 있었던 독립 만세 투쟁은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원의 만세 투쟁은 지식인과 범부(凡夫)를 가리지 않고 3월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3월 29일 수원군청 앞에서 특별한 만세 투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 소속 기녀(妓女)들의 만세 투쟁이었다.
그날 수원군청 바로 옆에 있는 자혜의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던 기녀들이 일제 국권침탈의 부도덕성을 이야기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수원의 기녀들은 그녀들이 태어나기 100여 년 전에 있었던 정조대왕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연에 참여했던 궁중 기녀들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느 지역의 기녀들과 달리 조국애가 남달랐다.
이러한 기녀들에게 수원군청과 경찰들은 병원에서 성병검사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말로는 건강검진이지만 실제로는 남성들을 상대하다가 성병에 걸렸는지를 확인하는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는 수원의 기녀들을 엄청나게 모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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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기녀들은 앞서의 이야기처럼 정조시대 수원 화성행궁의 궁중무용수를 계승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각종 연향에 참여하는 무용수들은 거의 대부분 궁녀들이었다. 일반 궁녀들보다 춤과 무용에 뛰어난 궁녀들이었다. 무용과 노래를 담당하는 궁녀들은 지방의 관아에서 관기(官妓)중에서 영특한 이들을 선발하여 한양의 궁중으로 보내어 의녀(醫女)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의녀에 합격하면 의술을 배움과 동시에 그녀들이 그간 배웠던 춤과 노래를 왕실에서 개최되는 각종 연향에서 선보였다. 그래서 같은 궁녀라고 하더라도 궁중무용수인 의녀들은 매우 화려했고 그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특히 수원의 화성행궁에 있던 궁중 무용수들은 1795년 윤2월에 개최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에서 7번의 무용을 선보이면서 조선 전체에 그녀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수원 기녀들에게 일본의 본토에서 몸을 파는 매음녀(賣淫女)와 같이 취급을 하며 성병검사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분노할 일이었겠는가? 그녀들은 태황제인 고종의 승하로 분노의 마음을 갖고 한양으로 곡(哭)을 하고 왔는데, 일본인들이 엄청난 모욕을 주고 있었기에 새로운 투쟁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미인보감의 미녀 김향화
수원 기녀(妓女)들은 수원군청 앞에서 장엄한 만세투쟁을 시작하였다. 3월 1일 만세 투쟁이 전개된 전국 6개 도시 중의 한 곳인 수원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수원 기녀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일본 순사들은 너무도 깜짝 놀라 그녀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당시 기녀들의 독립 만세투쟁을 이끈 기녀는 김향화(金香花)였다. 김향화는 1897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김이순이었는데, 그녀는 1918년에 경성일보사의 사장이었던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만든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수록될 정도로 명망있고 아름다운 기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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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어서 멋을 더하였다. 순한 성품에 귀염성이 있었고, 탁음이 섞인 애원성이 있는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특기가 있었다. 아마도 전국 최고의 기예를 지니고 있는 수원 재인청의 모든 무용과 노래를 배운 듯 했다. 이 재인청의 기예를 배워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가 바로 무용수 최승희이다. 그러니 재인청의 기에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전국에서 최고의 기녀로 알려진 그녀는 1월 21일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체의 가무(歌舞)를 중단하고 근신하였다. 임금님이 독살되어 돌아가셨는데 가무를 즐기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녀와 수원 기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향화는 동료 기녀들에게 일본군에게는 술도 따라주지 말며, 권주가도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다!" 라고 늘 동료 기녀들에게 이야기 하였다. 엄청난 자부심인 것이다.
김향화는 수원 기녀들을 거느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망곡례(望哭禮)를 치룬 이틀 후인 3월 29일 수원군청에서 독립만세투쟁을 전개했다. 신분이 천한 기녀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단순한 기녀들이 아닌 임진란의 진주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을 계승한 의기(義妓)였다.
서대문 형무소 8호실의 지도자 김향화
수원 경찰에 체포된 김향화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19년 5월 27일 재판에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6개월의 실형은 독립운동가 주모자들에게 내리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이 주는 의미는 김향화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상당히 두려운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일개 기녀에게 3.1만세투쟁의 독립선언서 서명자들과 유사한 형벌을 가했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졌다.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생활은 너무도 비참했다. 엄청나게 가혹한 형벌과 하루에 한끼 밖에 주지 않아 배고픔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장은 김향화를 가장 힘든 8호실로 보냈다. 서대문형무소 옥사 8호실부터 13호실은 여수감자들이 머무는 여옥사이다. 그중에서도 8호실은 일제가 볼 때 가장 죄질이 무거운 독립운동가들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 8호실에 김향화와 함께 수감된 이가 그해 6월에 천안-병천 만세운동으로 3년형을 받고 들어온 유관순, 파주에서 만세운동으로 들어온 임명애 구세군 부교(집사), 개성 4인방으로 불리며 훗날 의열단 단원 김시현과 결혼한 독립운동가 호수돈여고 출신의 권애라였다.
일제는 이 8호실에 수감된 여인들이 잠도 자지 못하게 하고 앉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많은 인원을 집어넣었다. 그녀들은 하루종일 서 있어야만 했다. 이는 참으로 악독한 일이었다. 김향화는 어느 순간 8호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대범하고 현명하게 행동하였다. 모두 서있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수감된 여인들을 모두 파악하고 한명 한명씩 돌아가면서 앉아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몇날 몇일 앉지 않고 자신보다 나이 어리고 힘없는 여인들에게 쉴 수 있게 배려를 하였다.
그리고는 감옥안에 있는 여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기녀답게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다. 김향화는 개성난봉가를 가르치며 지친 여인들에게 흥을 넣어주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힘을 보충하였다. 이때 만난 권애라는 개성의 호수돈여고에서 배운 서양 노래를 그녀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영화 밀정의 주인공인 공유 배역이 바로 권애라의 남편인 의열단원 출신의 김시현이다. 두 사람의 평생의 삶을 정리한 책 ‘권애라와 김시현’에 김향화의 이야기가 나온다. 서대문형무소 8호실을 이끌어간 지도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화고녀 출신의 유관순이 아니라 수원의 기생 김향화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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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화를 계승하자!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계속 고문을 받았다. 너무도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만기 1개월을 남기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더 이상 감옥에 있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일제가 김향화를 감옥에서 내보낸 것이다. 수원에서 3.1운동을 하다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선경이 모진 고문으로 수감생활 중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한달 만에 죽은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고문으로 김향화와 같은 8호실에 있던 유관순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향화는 감옥에서 나온 후 김우순으로 이름을 바꾸고 생활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신분을 바꿔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삶 때문에 그녀의 행적은 그 뒤 알 수가 없다. 한국전쟁 중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지만 그녀의 삶을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김향화는 2009년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표창장과 훈장을 수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하루빨리 그녀의 연고자들이 나타나 그녀의 훈장을 찾아갔으면 한다.
가장 낮은 신분의 기녀들까지 나선 독립만세 투쟁이 104년 전에 이 땅에서 전개되었다. 우리는 이 역사적 혁명을 다시 깨닫고 계승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운 선조들의 뜻을 이어 자주의 정신과 실천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망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진심으로 사죄하면 우리는 용서하고 미래를 위해 일본과 함께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사과 없이 거짓만 일삼는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3.1독립만세혁명 104주년에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투쟁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고 또한 새로운 조국과 한반도 평화의 미래를 만들 것을 생각한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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