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정택 칼럼니스트
초대전 6월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통인갤러리
‘그림 기법은 조형 원리에서 나오고 원리에는 관점이 요구된다. 기법 속 녹아있는 관점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며 그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결정하고 작가가 지향하는 가치를 구체화한다’(작가 노트 중에서)
<라일락-포도주-봄>, <나부끼는-걷는다-봄>는 정면을 보며 측면을 가늠하였다. 획이 쌓여 깊이를 더한다.
‘그때 백사장을 쏜살같이 뛰어가는 흰 개가 흘끗 눈에 들어왔다. 내리찍는 햇살을 피할 길 없어 빛의 비늘을 번뜩이는 바다와 하얗게 달아오른 백사장의 경계를 따라 흰 개가 질주했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획이라도 긋듯이 달려 나갔다’
되돌아갈 수 없는 선분적인 일차원의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놓인 류장복의 획은 속도를 가진다. 속도(velocity)는 빠르고 느림(speed)이 아니다. 멈춤도 일정한 속도의 지속이다.
속도를 지닌 획은 시작과 끝이 있는 궤적을 흔적으로 남긴다. 지향적인 붓질의 생명의지가 거기 스며들기 때문이다. 획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그 사건은 작가의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의 범주 안에 있다.
그림의 생명력은 획과 획 사이의 여백에 있는 호흡에 있다. 들숨과 날숨을 저버린다는 건 죽음이며 감각이 배제된 창백한 그림만 남는다.
조형원리와 관점의 관계를 어떻게 긴밀하게 조직하느냐가 관건이다. 새로운 회화 질서 수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흔들리는 빛을 포착한 인상주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개체와 개체 사이는 공기이고 빛임을 알 수 있었다. 개체는 볼륨으로 드러난다. 투시와 명암을 필요로 한다.
그림을 위한 언어적인 지식 또한 필요해졌다. 지적인 호기심은 그림보다는 철학 등으로 옮겨갔다. 회화는 언어를 필요로 하지만 언어 그 자체는 아니다.
독일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역저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인간’대신 ‘현존재’를 내세우는 새로운 개념으로 서구 전통 철학을 바로 잡고 재구성했다. 특히 언어는 인간의 현존재를 대표하며, 존재 이해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
하이데거가 주목한 것은 ‘존재’와 ‘시간’의 관계이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존재는 없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일 뿐이다. 류장복은 존재의 기운과 사건에 주목하기보다는 일상을 들여다봄으로써 현존재의 역할에 충실한다. 이러한 고민 속 ‘아 참 나 화가이지’라는 깨달음은 화가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했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경계에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물리적으로도 작가는 작업실과 작품 수장고를 찾아 점점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아파트는 경배의 대상인 신이 되었다. 작가는 생래적으로 그러한 군웅할거하는 집합적 물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류장복은 이미 신들의 도시가 된 일산에 편입되지 못한 산황동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새로움으로 덮어쓰기를 못하고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것들의 후줄근한 자태에 눈길이 갔다.
해질녘이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비포장 길에 물이 고여 흥건했다. 전봇대가 비스듬하고 전신줄과 잔가지가 엉켜 쑥대머리 같았다. 후미진 길에 오가는 것들도 많았다.
2000년대 철암이 갖는 맥락은 경계를 거쳐 좀 더 본질적인 도심 속 장소를 찾게 되었다. 서울의 한강변 용산 한남동 산동네를 대상으로 삼았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 빈 집,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마당 없고 막다른 꼭대기 집 등.
장소는 시간을 거스른 내부적인 시선을 갖게 한다. 한남동 사람들, ‘너 그리기’는 철암에서 마주한 시간 속 현존재인 또 다른 나의 모델이 되었다. 자신을, 장소를 옮긴 인간의 근원을 그렸다.
‘누군가의 부고는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별 다른 사건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은 인식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의 삶에 관여하면서 산 자의 모습을 비추인다’(작가 노트 중에서)
철암을 다시 끄집어 낸 계기는 월간지 <태백>이 2016년 복간되면서 글과 그림을 2년간 연재한 것이었다. 철암이라는 장소성, 들락거리며 기억한 것들에 대한 메시지를 정리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말로 다 못해 글로 쓰고 글로 다 못해 노래하듯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경배의 잔을 들었다’ 난 이런 말을 하였다. “류장복 정도 되니까 2020년대에 철암을 소환해도 말이 되지 않나”
한국 현대 미술을 들여다 보면 회화다운 회화, 회화 고유한 아우라를 의외로 만나기 힘들다. 식당을 가도 고단한 삶에서 위로가 되었던 밥다운 밥을 잘 먹을 수 없듯이. 이 밥은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그러한 거다.
물감의 물성은 사생과 작업실의 차이를 메꾸어준다. 본질적인 질료를 통해 엇갈린 시간과 햇빛과 바람이 다른, 땅의 냄새가 다른 공간을 드러내고자 했다.
감각도 아니고 기억도 아닌 ‘기억감각’은 기억한 것을 되새김질해서 다시 펼쳐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각한 것을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면 기억에는 관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2014년 전시 제목 <투명하게 짙은>은 대상을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이해한 후에 물감을 쌓아가는 여정을 상징한다. 작가의 방에서 창을 통해 마주하는 풍경과 외부 매체로 접한 타인의 사건을 중첩하여 보여준다.
드로잉 도구가 스케치북과 연필에서 태블릿 PC로 넘어오자 ‘사생의 자유로움’을 획득했다고 한다. 유화로 옮기면서 발생하는 기억의 지층들은 얇고 투명한 것에서 겹겹이 얹어지는 물감과 기억으로 함께 짙어진다.
회화의 진정성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류장복은 회화를 소통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회화는 ‘응시와 관조’, ‘감각과 기억’이라는 연결고리로 길다란 형태를 가진 하나의 덩어리(매스)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회화가 언어이기에 앞서 그림 자체의 물성적 존재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였다. 육안의 생생함과 기억의 되새김으로 중첩되는, 응시와 관조의 교차점을 향해 수렴하는 회화의 태도를 견지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관념에 붙들리지 않고 감각에 매몰되지 않는 한국의 대표적 회화지상주의자임을 천명하는 다른 말로 들린다.
견뎌야 하는 시간이 거듭되다가 기다림의 시간으로 바뀌었고 그 기다림은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다.
서울 인사동 통인갤러리 류장복 초대전 <아침>은 3년전 최초 기획되었으나 코로나팬데믹으로 미루어져 왔다. 시간 속에서 자신을 사랑했기에 견딘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객이 만나는 또 다른 시간은 6월 12일까지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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