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한신대 교수
명나라에 항거한 국왕 광해!
‘왕(王)’이 항거를 한다.
조정의 대신들과 사대부들이 목숨같이 섬기는 강대국에 항거를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임금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국왕일 것이다.
과연 강대국에 항거하는 국왕이 우리 역사에서 존재하였을까? 그렇다. 실제 존재하였다. 이런 국왕이 소설이 아닌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하였다. 바로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이었다.
광해군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폭군(暴君)으로 알고 있다. 연산군과 함께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반정(反正)에 의해 국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이기에 그는 성군(聖君)이 아닌 폭군으로 기록되어졌고, 그 인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국왕으로서의 그의 역정을 살펴보면 그가 과연 백성들에 대하여 폭군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영화 ‘광해’에서 나오듯이 기득권이 가지고 있는 사대주의를 타파하고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에 노력한 국왕일 수 있다. 특히 그의 대외 관계 측면에서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조선 건국 당시부터 조선의 보호국으로 자처한 명나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대를 하지 않고 새롭게 일어나는 군사 강국 ‘후금(後金)’에 대해여 온건한 외교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중립 외교의 달인이었다.
그가 초월적 존재인 국왕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으로서 존재하는 동안 오로지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항거가 지속되었다. 그런면에서 광해군은 반드시 민족사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분조(分朝)로 임진왜란에 맹활약한 세자 광해군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선조(宣祖)’는 조(祖)라는 시호를 받을 만큼 성군이 아니다. 그는 약간은 무능하고 또 약간은 자기 고집이 셌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신하는 몹시 좋아하고 능력은 있으나 자신이 싫어하는 신하는 의도적으로 발탁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선조이기에 임진왜란에 직면해 자신은 의주로 몸을 피하고 위기에 처한 전쟁 상황은 둘째 아들인 광해군에게 맡긴 것이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문제로 형인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인 평양에서 아버지 선조에 의해 급한대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당시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사실 선조는 사태가 악화되면 압록강을 건널 계획까지도 세워 놓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타국으로 건너가겠다고 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이다.
광해군은 분조(分朝)로서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백성들은 그를 따랐다. 낮에는 숲에서 숨고 밤에 이동을 하면서 광해군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그야말로 풍찬노숙 하면서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으니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미 조달과 병기를 만들어 각 군영에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 선조가 해야 할 일을 세자인 광해가 다 한 것이다. 그러니 당시 군사를 보낸 명나라에서조차 선조보다 광해군이 낫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선조는 의주에서 편안히 있다가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마저 수복하자 그때 돌아와 자신이 의주에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그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물리쳤으니 임진왜란의 승리는 오로지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망발을 일삼았다.
선조와 서인에게 핍박받는 광해군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광해군의 위치는 전쟁의 시기보다도 어려운 지경에 처해졌다. 선조는 전쟁 당시에도 광해를 괴롭혔다. 백성들 사이에서 아들인 광해가 인기가 높아지자 마음속으로 삐져서 임금의 지위를 물려주겠다는 양위 파동을 무려 15번이나 하였다. 쫀쫀함의 극치였다. 이런 임금이었기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준비를 하는 동안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더욱 핍박을 받게된 된 것은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고 정식으로 세자 책봉식을 하자는 신하들의 건의에 왕비가 죽어 홀로 있는 자신에게 다시 국혼(國婚)하라는 건의를 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었다. 정말 황당한 국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급하게 18살의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 여인이 바로 인목대비였다. 선조와는 32살 차이였다.
선조는 나이 어린 인목대비를 아꼈고, 그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사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보다도 더욱 인기가 좋은 광해군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중에 급하게 지정했던 세자의 지위를 온전하게 보호해주고 그를 진짜 세자로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득권인 서인들도 광해군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극복의 진짜 주인공이 선조와 자신들이 아니라 세자 광해군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광해군이 정식 책봉식을 거친 진짜 세자가 되고, 뒤이어 선조가 죽고 난 후 조선의 국왕이 되면 몹시 껄끄러워지기 때문이었다. 혹시 광해가 자신들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나라가 큰 아들 임해군을 세자 책봉해야지 왜 둘째인 광해를 세자로 두느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를 핑계로 선조와 함께 광해군을 흔들어댔다.
선조와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에게 세자를 물려준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선조가 미처 세자의 자리를 영창대군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광해군은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다.
중립외교를 추진하는 광해임금
당시 사회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의 신흥 국가인 후금(後金)이 강성해지고 있을 때였다. 조선의 기본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다. 즉 강자에게 몸을 굽혀 섬기고 약자에게 약간의 위세를 과시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비겁한 정책일 수 있겠지만 이 정책은 조선을 지켜온 오랜 전통이었다. 힘이 없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비록 나라의 땅덩어리는 조그마하지만 온 백성이 하나되어 힘을 키웠다면 아마도 사대교린 정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이런 시대에 국왕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다. 전쟁이 지난 후 삶을 고통스러워했던 백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노심초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 인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명(明)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신흥국가인 청과의 관계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 길만이 새로운 전쟁을 막는 길이자 백성들이 전쟁의 후유증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전쟁을 이끌면서 명나라의 오만함에 기가 질렸다. 당시 백성들은 명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군은 얼레빗이요, 명나라 군사는 참빗이다.” 오히려 일본군보다 조선을 도와주러 왔다며 일본군보다 더한 착취와 악행을 저지른 명나라 군사들을 빗대어 나온 말이다. 이렇듯 명나라 군대는 지원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우리 강토를 유린했다. 흡사 현대의 우리 모습과도 같지 않은가!
강력한 후금(後金), 허장성세 명(明)
명나라는 여진족인 누루하치의 군사들이 강력하게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백두산 아래에서 성장한 건주여진인 누루하치의 군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성장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큰소리만쳤지 군사적 위력은 없었다. 그 사이 여진족은 1616년 정식으로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1115년 여진족 추장인 완안아골타가 건국하여 한때 중원을 제패하고 연경(북경)에 수도를 건립하였던 ‘금(金)’ 나라를 계승한다고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금나라 창건 500년 뒤에 다시 금나라를 건국한 것이니 이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뜻 깊었을 것이다.
후금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 대해 아버지의 나라로 대우하였다. 조선이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대우하고, 여진족들은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로 예우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는 여진족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하였다.
그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로 섬겼던 후금이 어느 순간 군사적 강대국이 되어 형의 나라가 되고 조선은 아우의 나라가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 모두 여진족인 후금에 대하여 자존심이 상하였지만 이를 제압할 군사적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으로 자처하는 나라였다. 허풍선이에 불과하였지만 겉모습은 훤훤장부같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했다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해오자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후금을 상대할 힘은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해준 은혜를 갚으라며 파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파병 요청
명나라는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후금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617년에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파병 요청에 조선의 조정은 일제히 명나라를 위해 파병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국왕 광해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기에 전쟁이 다시 나거나,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나라의 경제와 조선의 산하가 망가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명나라의 파병요청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군대를 가본 적도 전쟁의 현쟁에 있어본 적도 없는 인간들은 명나라에 당연히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얼마나 참혹한 상황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군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강력한 국방과 북한을 때려잡자는 반공적 발언을 일삼고 있다.
광해는 누루하치를 예의주시하였고, 의주 지방에 있는 정탐꾼을 보내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고 후금에 대해 대응할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거나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돼 쓸모가 없고 무기도 갖추지 못했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거듭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파병 요청은 집요했다. 1618년 7월, 조정은 명나라의 거듭된 강경한 요구에 밀려 끝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은 출정에 나서 조 · 명 연합군으로 편성되었다.
광해군의 위장 파병
광해군은 3만 명의 군사로 국경지대를 지키게 하고 군량미 조달에 차질이 없게 하는 한편, 출정한 강홍립에게는 “관형향배(觀形向背)를 취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즉 형세를 잘 보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위장 파병이었다.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파병은 하되 어느 편도 들지않게 하여 나라를 지키려한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강대국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항거인 것이다.
당시 광해군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선택한 것은 그가 여진어를 알기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명나라어만이 아니라 여진어도 익히고 있던 장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이 만약에 여진족과 대결을 한다면 그가 여진어로 직접 소통하여 조선의 군사들에게 피해를 없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국왕의 이와 같은 은밀한 지시로 강홍립은 진군하면서 군량미가 뒤에 처져 있다고 핑계대고 머뭇거렸다. 당시 부원수인 김경서에게도 광해군은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강홍립을 도와 후금과의 대결을 하지 말고 항복할 수 있으면 항복하라는 밀명을 준 것이다. 김경서는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 계월향과 함께 왜장을 죽인 천하의 명장이었다. 강홍립과 김경서라는 조선 최고의 명장이 파병군을 이끌고 전장터로 나갔다. 그러나 강홍립과 김경서는 앞으로 나가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거짓 투항했다. 여진어를 잘하는 역관을 미리 데리고 가서 후금 군대의 장수들에게 “우리 군대는 마지못해 출정에 나섰다”고 광해군의 뜻을 은밀하게 전했다. 결국 조선의 군사들은 단 한명도 다치지 않고 모두 살 수 있었다.
중립외교를 통해 조선을 지키고자 하는 광해군
후금의 군대는 광해군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명나라만을 절대적으로 위하는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후금의 장수들은 강홍립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들을 예우하여 자신들의 군영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허락했다. 강홍립은 이때부터 비밀리에 후금 군영의 정보를 조사하여 비밀 보고서를 종이 노끈으로 만들어 광해군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후금과 화친을 맺자고 비밀 보고서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광해군과 강홍립은 후금의 정세를 정확히 이해하여 명나라의 압력과 무능한 사대주의자들인 조선의 대신들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강홍립의 투항 사실을 알게 된 조정의 대신들은 사자(使者)로 온 후금의 사신들을 죽여야 한다거나 강홍립의 가족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제 정세는 전혀 파악도 못하고 그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울부짖기만 한 것이다. 파병하여 나간 조선의 군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허튼 명분만 내세울 따름이었다. 자신들의 자식들을 파병군에 보낸 이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말도 안되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태도에 대해 광해군은 질릴 정도였다. 아니 그의 표현대로 미치기 직전이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1초(哨, 125명)라도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군사를 요구하는 글이 명나라에서 두 번이나 왔을 적에 내가 걱정한 바는 곧 원병을 보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심이 본래 굳건치 못하고 군사가 평소에 교련이 되어 있지 않아 하루아침에 몰아 들어가더라도 싸움에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투항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를 절통해 하는도다. 지난해 명에서 청병하여 왔을 적에 경들은 마치 북 한 번 울리면 싹 쓸어 버릴 것 같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야 병가(兵家)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 내 이를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근심 걱정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더욱 돋아 발광할 지경에 이르렀도다.” <광해군 일기> 권139, 11년 4월 8일 기사.
인조반정에 의해 혼군이 된 광해군
이처럼 광해군은 신하들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환장할 정도였다. 마음의 병이 돋아 발광할 지경이라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소리칠 정도까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신하들은 국왕인 광해군의 고통과 나라를 위한 중립외교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단 한조각의 마음도 내어주지 않았다.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스레 주장하던 관료들은 사사건건 광해군을 괴롭혔고, 그로 인해 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과 자신의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자신을 괴롭히던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해서 서궁(西宮)에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다.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을 그는 하고야 만 것이다. 마지막 판단을 올바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폭군’, ‘혼군(昏君)’으로 내몰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결국 광해군을 내몰고 조선의 국왕이 된 인조가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은 절대 안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을 대규모 공격하면 대한민국의 군대를 파병할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영국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를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미국의 요구로 우크라이나에 155mm 포탄을 대여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 것도 해서는 안되는 일인데, 이제 참전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러시아 군대와 싸우겠다는 참전 의지를 들은 러시아는 발끈하고 대한민국과의 경제전쟁을 선포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 석유를 제공하여 북한의 경제를 회복하고 미국과 일본 등과 대결하게 하고자 한다. 이러한 무능한 외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나라 전쟁에 왜 우리가 나서서 우리 경제를 망가뜨리고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명나라에 사대하는 무능한 조정 관리들과 사대부들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하다못해 조선의 국왕 광해군도 강대국인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 중립외교를 펼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위장 파병을 단행하여 후금으로 하여금 조선의 군사들을 죽이지 않게 하였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조마조마한 심정을 넘어 광해군처럼 미칠 지경의 상황에 다다르고 있다.
하루빨리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참모들 그리고 국방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국익이 무엇인지를 고려하여 우크라이나에 파병한다는 정책을 반드시 철회하고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외교정책을 추진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라의 대통령은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강대국 미국에 항거는 못할 망정 굴종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자주 국가 건설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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