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왕조 체제를 무너뜨리려 칼을 든 용녀의 항거 < 김준혁 항거의 역사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뉴스버스(Newsverse)
김준혁 한신대 교수
우리 역사에서 여성 혁명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남성이 우선시되는 가부장적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 봉건체제를 뒤엎고자 하는 혁명을 주도한 여성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난 자유인 황진이, 김만덕 등도 모두 시대에 앞서는 여인임에는 분명했지만, 스스로가 주도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한 여인은 조선 역사상 ‘용녀(龍女)’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인, 용녀!
이름도 범상치 않은 용의 여인, 용녀.
그녀는 왜 세상을 바꾸려 한 것이고, 그 혁명은 어떻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을까?
미륵세상을 꿈꾼 여인 용녀(龍女)
‘용녀(龍女)’가 얼마나 대단한 여인인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용녀는 무당 ‘원향(元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용녀의 남편은 ‘여환(呂還)’이라는 승려다. 용녀는 무당이고 여환은 승려다. 무당과 승려의 혼인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였다기보다는 철저하게 양반 사대부들이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 왕조 국가를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세상, 아니 그들이 꿈꾸는 이상 세계인 미륵세상(彌勒世上), 용화세상(龍華世上)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두 부부가 양주목사 최세필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 여환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용녀는 혁명의 대의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 강물처럼 줄줄이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용기는 혁명에 대한 진정성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노론 사대부들에 비해 진보적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비극적 역사가 이긍익 마저도 그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용녀에 대해 부정적 입장으로 글을 전개하였다. 이긍익은 소론의 명문가 자제 출신으로 민중의 혁명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에 그녀의 이야기를 괴상하고 허탄하기 짝이없고, 간혹 '무도한 말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무도한 말'이라는 것은 바로 혁명을 통해 국왕을 몰아내고 백성들에 의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호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용녀를 높이 받들고 그와 함께 누구나 평등한 용화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용녀와 여환의 만남
용녀는 황해도 은율의 양가집 딸이었다. 황해도 은율은 해방 이후 최고의 민중운동가 중 한분인 백기완 선생의 고향이다. 은율에서 멀지 않은 곳이 바로 장산곶이다. 장산곶의 상징인 장산곶매는 불의와 탐욕의 기득권을 공격하는 그야말로 민중의 매였다. 그러니 황해도 장산곶과 은율은 일찍부터 반봉건 혁명의 기운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용녀는 양가집 규수답지 않게 특이한 이름이 있었다. 바로 ‘원향’이었다. 양가집 규수가 향기 향자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향자를 쓰는 것은 보통 기생들이나 쓰는 것이지 일반 양가집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이름인데, 원향의 부모는 그녀에게 이런 특이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녀의 이름을 원향이라고 지어준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체포되고 한양으로 올라와 의금부에서 좌의정 조사석(趙師錫)에게 국문을 받았는데, 이때 그녀의 신분을 무당이라고 하였다. 그녀가 양가집 규수였지만 아마도 이상한 무병(巫病)에 결려 신내림을 받아 무녀(巫女)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무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무당이 되면서 신분의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무당은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의 하나였다. 백정, 승려, 가죽신발을 만드는 갖바치, 관아에서 일을 하는 방자 등과 같은 천민이었다. 양가집 규수에서 갑자기 천민이 되어 천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상당히 컸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당이 되어 보통의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영적(靈的) 신통력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함께 받아들이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은율에서 무당으로 자리는 잡아가는 와중에 강원도 통천 출신의 승려인 여환이 찾아왔다. 그리고 여환은 원향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였다. 오랜 수행을 하여 깨우침을 얻은 자신의 능력과 원향의 신통력을 합하여 봉건왕조를 타파하고 용화세상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둘은 곧바로 하나가 되었다.
여환(呂還)은 누구인가?
여환은 강원도 통천(通川)의 승려였다. 그는 일찍이 김화(金化) 천불산(千佛山)에서 수행을 하다가 칠성(七星)이 강림하여 3개의 누룩을 받았다고 한다. 여환은 자신의 아버지가 천불산에서 성재(聖齋)를 3번 차리고 자신을 낳았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을 신비화하고자 하는 일종의 허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여환은 ‘누룩’에 대하여 특별한 설명을 하였다. ‘누룩’은 한자로 쓰면 ‘국(麴)’이다. ‘국(麴)’과 나라 ‘국(國)’은 음(音)이 서로 같아서 자신이 3개의 누룩을 받은 것은 바로 ‘3국(國)’을 받은 것이고, 3국은 곧 ‘3한(韓)’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3한’이란 조선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수행중에 칠성으로부터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전형일 수 있다. 자신에게 칠성말고도 ‘수중노인(水中老人)’과 ‘미륵삼존(彌勒三尊)’이 계시를 주었고, 그는 이러한 뜻을 3년 동안 수행하면서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다녔다고 한다.
여환은 강원도에서 경기지역으로 와서 자신이 칠성과 미륵삼존으로부터 하교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경기 북부지역의 영평(永平) 출신의 풍수가인 황회(黃繪)와 천민 대우를 받던 정원태(鄭元泰)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곧바로 의기투합하고, 지금의 시대가 석가(釋迦)의 시대인데, 이미 운수가 다해 곧 망할 것이고, 미륵(彌勒)이 세상을 주관하게 될 것이라고 하고 다녔다. “오늘날 승려는 부처를 공경하지 않고, 백성들이 부처를 공경한다. 너는 과연 그것을 아는가? 이와 같은 때에는 용이 자식을 낳아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바람과 비가 고르지 않고, 오곡은 여물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을 것이다.”
숙종대 극에 달한 당파싸움으로 조정 관료들과 양반사대부들은 민생(民生)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노동과 생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만 빠져들었고, 이미 사라져서 없는 중국의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로 충성할 뿐이었다. 기득권이 백성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나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흔적이라도 있었다면 백성들은 여환의 말을 믿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성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었기에 조금만 더 투쟁하면 우리 스스로가 기득권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백성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 이 말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환이 가는 곳곳마다 여환을 성인(聖人)처럼 받들어 모셨다. 여환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를 천불산 선인(仙人)이라 일컫고 일찍이 ‘영(盈), 측(昃)’ 두 글자를 암석(巖石) 위에 새기고 ‘이 세상은 장구(長久)할 수가 없으니, 지금부터 앞으로는 마땅히 계승(繼承)할 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용(龍)이 곧 아들을 낳아서 나라를 주관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천불산의 신선인데 인간세상에 온 것이고, 자신이 곧 용과 결합하여 아들을 낳아 백성과 함께 하는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기득권의 권력이 가득 찼지만〔盈〕, 그 권력은 반드시 기울어진다〔昃〕는 이야기는 역사의 진리인양 백성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원향, 용녀가 되다.
여환은 자신의 측근인 전성달을 통해 원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원향에게 청혼을 하였다. 칠성과 선인, 미륵삼존의 계시를 받아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여환을 원향은 충분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환에 대한 백성들의 인심은 너무도 좋았다. 관아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황해도 일대 백성들에게는 여환과 원향은 자신들의 한(恨)을 풀어줄 지도자였다.
여환의 측근인 황회는 묘자리를 잡아주는 풍수가였는데, 그의 아내는 ‘성인제석(聖人帝釋)’이라 불리는 무당이었다. 황회와 그 처는 신령스런 술법이 있어, 몸이 아픈 사람들 집에 가서 신당(神堂)을 차리고 귀신을 쫓는 굿을 하면 사람들의 병이 나았다. 그러니 당연히 추종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황회의 아내인 무당은 여환과 원향에게 또 다른 무당을 소개해주었다. 황해도 일대에서 큰 무당으로 인정받고 있던 ‘계화(戒化)’였다. 계화는 ‘정씨(鄭氏)’ 성을 가졌는데, 백성들에게 자신을 ‘정성인(鄭聖人)’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정감록(鄭鑑錄)》에 나오는 정도령(鄭道令)의 다른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정도령은 남자이기에 계화는 스스로를 정도령이라 말할 수 없으니, 여자 정도령격인 ‘정성인’으로 자처한 것이다.
그녀는 원향의 이름을 ‘용녀(龍女)’로 바꾸도록 하였다. 용이 인간으로 환생을 한 여인이거나, 아니면 용의 신통력을 가진 여인이란 의미일 것이다. 사람들은 원향을 ‘용녀’라 부르기도 하고, 용녀부인(龍女夫人)이라고도 불렀다. 용녀부인은 이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승려 여환의 아내가 아니라 전체 혁명조직의 수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계화는 용녀에게 장군의 복식을 입히게 하였다. 조직의 참모 역할을 하는 계화는 용녀를 위한 특별한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비록 성인이 있더라도 반드시 장검(長劍)과 관대(冠帶)가 있어야 하니, 제자가 되는 자는 마땅히 이런 물품을 준비하여 서로 전파하여 보여야 한다’며 백성들 스스로가 장검과 관대를 준비하게 하였다.
마침내 계화는 용녀에게 장검을 차고 군복을 입게 하였다. 여인의 몸으로 미륵세상 만들기의 우두머리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계화의 이러한 계획은 황해도 백성들의 마음에 잘 전달되었고, 그들은 기득권의 나라에서 벗어나고자 용녀와 여환을 더욱 적극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한양으로 진격하라!
상당한 신통력 보여 주었던 계화가 여환과 용녀를 자신보다 높이 받들고 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이들을 높은 존재로 보고 그의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 따르는 이들 중에는 군인들도 있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포수 오순언(吳順彦) 등 5인과 군관(軍官) 박명순(朴命順) 등을 포섬하였고, 이들은 여환의 혁명에 동참하였다.
여환은 어영청(御營廳) 소속의 군인인 김시동에게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하는 의도를 비쳤다. 그리고는 그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였다. 여환은 “군장과 복색은 버드나무를 깎거나 베옷을 물들여서라도 준비해야 한다” 하고, “성이 비면 훈련원에 모였다가 궁궐에 들어가야 한다” 고 하였다.
은밀히 군사들을 모아 혁명을 추진하여 성공하면 조선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십이제국(十二諸國)” 즉, 인간 세상 전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자신들의 혁명 성공이 조선이 아닌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나라의 혁명으로 간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선에서의 만들어진 평등세상이 전 세계로 나아간다면 정말 꿈같은 세상이 아닌가!
계화는 ‘7월에 큰 비가 퍼붓듯 내리면 산악(山岳)이 무너지고 국도(國都)도 탕진(蕩盡)될 것이니,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계화는 자신을 따르는 십여 명에게 “상경입성(上京入城)”과 “대수경탕(大水傾蕩)”등의 글이 써져있는 괴서(怪書)를 유포하게 하였다. 상경하여 서울로 입성한다는 것이고, 큰 비가 내려 한양이 홍수를 만나 도시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널리 퍼뜨려 민심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어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용녀와 여환의 생각은 달았다. 비록 계화가 영험한 무당이고, 조직의 핵심 참모이기는 하나 실질적인 주장(主將)은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너무도 많은 백성들의 한양 진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용녀는 한양으로 몰래 들어가 궁궐을 급습하여 국왕을 죽이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미륵세상을 만들고자 추진하였다. 당시 백성들의 삶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16~18세기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조선에도 밀어닥쳤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6)으로 수많은 백성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국왕의 무능을 이야기하고 기득권 세력들을 물리치고 진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랬다. 정도령이 나타나 세상을 구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조선 백성들 누구에게나 있었다. 용녀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정확히 읽었다.
용녀는 7월 15일에 여환, 황회, 정원태에게 양주 사람 김시동, 최영길, 이원명과 영평(永平) 사람 정호명, 이말립, 정만일 등과 각기 군장(軍裝)과 장검(長劍) 등의 물건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를 팔아 무기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무기를 어떻게 한양 도성안으로 가지고 가느냐였다. 최소 백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이들이 칼과 활을 차고 한양 도성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숭례문과 돈의문 등 도성의 4대문에 있는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가는 이들을 막거나 검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녀는 꾀를 내었다. 바로 도성(都城)안의 친척이 죽어 장례를 치루기 위해 상여(喪輿)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명목을 만든 것이다.
실제 이 계획은 성공하였다. 김시동 등이 상여안에 가득 무기를 넣고 한양 도성안으로 들어갈 때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敦義門) 수문장들의 검문은 없었다. 상여안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끝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안전하게 무기가 들어가고 나서 용녀는 남자의 복식을 하고 한양 도성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용녀는 여환과 함께 사람들에게 7월 15일에 비가 내리면 바로 궁궐을 침입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였다. 자신이 용녀이기 때문에 용이 하늘로 승천하여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반드시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용신앙(龍神仰)’에서 비는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조선후기 명군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태어나던 날에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리고 하늘에서 수많은 용들이 날아다녔다고 《정조실록》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용신앙이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고, 국가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치밀하게 용신앙을 만들어 자신을 신격화 하였다. 하다못해 미래의 국왕이 될 정조를 위해서 왕실에서조차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용이 가득 춤추며 돌아다녔다고 과장된 표현으로 기록하였고, 훗날 정조가 죽고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행장에 엄청나게 내린 비와 날아다니는 용에 대하여 적어 놓았다. 당시 시대의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용녀도 자신이 비를 만나 엄청난 힘을 얻어 미륵세상 만들 것이라고 혁명 세력들에게 승리를 확신하며 싸우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들은 7월 15일경이면 충분히 비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끝내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용녀와 여환은 일단 작전상 후퇴하기로 했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궁궐을 공격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용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기를, ‘공부가 성취되지 않아 하늘이 아직 응해 주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는 용녀와 여환 두 사람이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에 올라가 경문(經文)을 외며 하늘에 빌어 대사(大事)를 이루어 주기를 기원하였다. 이는 실제 그들의 도력이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보다 자신과 함께 하는 혁명조직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혁명은 한번 실패하면 다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조직원 내부에서 혁명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은밀히 국가 권력에 밀고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은밀한 행동이 소문이 나서 발각되는 경우가 있다.
혁명의 실패
용녀와 여환의 미륵세상 만들기 실패는 조직원 내부의 밀고는 아니었다. 너무도 큰 기대를 걸었던 혁명 참여세력들의 탄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용녀와 여환이 삼각산에서 경문을 읽으며 기도를 드리는 동안 주막집에서 술을 한잔했는지 모른다. 이들이 한탄하며 떠드른 소리가 양주관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용녀의 혁명에 대한 내용이 국왕과 의금부에 보고된 것은 1688년(숙종 14) 7월 27일의 일이다. 사건의 최초 보고자는 양주의 목사 최규서(崔奎瑞)였다. 최규서는 이보다 앞선 7월 18일, 양주 청송면 다탄(多灘) 근처에서 '성인의 영(聖人之靈)'을 칭하며 도당을 모으는 묘망한 사람이 있다는 삭녕 군수 이세필의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최규서는 조사해 보니 “성인의영”이 내렸다고 하며 백성들을 모으고 있었던 것은 수 명의 무녀들이었다. 또한 그 배후에는 영평의 지사(地師) 황회와 생불(生佛)이라 불리는 여환, 용녀부인이라 불리는 그 아내 원향이 있었다. 이들이 돈을 모아 군복과 전립 장검 등의 무기를 샀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최규서는 양주에서의 정보를 입수하고, 의금부로 이들의 역모 사실을 보냈다. 용녀와 여환을 기다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의금부 관원들의 급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모두 체포되었다. 결국 이들의 미륵세상 만들기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끝내 용녀와 여환은 8월 1일 군기시(軍器寺) 앞 사형장에서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아 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하직했다.
혁명의 여인 용녀의 계승자 개혁의 딸!
용녀는 조선시대 여인중에서 가장 특별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리 대역죄인이라 하더라도 여인들이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받아 사지가 갈갈이 찢겨 죽는 경우는 없었다. 사약을 받고 죽거나 아니면 목이 졸려 죽는 형벌은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얼마나 분노하였는지 능지처형만 전담하는 군기시 앞 형장에서 능지처형으로 죽게 하였다. 이는 용녀의 봉건사회에 대한 항거가 전대미문의 항거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용녀는 형장에 나와서도 당당하게 혁명의 정당성을 이야기했다. 혁명에 함께 참여했던 남성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목숨을 구걸할 때 용녀는 당당하게 미륵세상 만들기를 역설했다.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당시 국문을 하던 좌의정 조사석과 의금부사 그리고 각 군영의 대장들은 모두 충격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사건 전말에 대하여 보고를 받은 숙종 역시도 백성들의 무서움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가만히 우리 역사 5천년을 되돌아 본다. 우리들이 역사속의 여인들에 대해 어떤 생각과 평가를 하고 있을까? 신사임당, 이사주당, 빙허각 이씨, 남명 조식의 어머니, 한석봉 어머니 등등!
모두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들 공부 잘 시키는 어머니, 남존여비의 이념에 충실하고 이것이 맞는 것이라고 순응하면서 살아온 여인들, 우리는 역사속에서 이런 여인들이 참다운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최고위 화폐의 역사 인물이 바로 신시임당 아닌가!
그런데 350여 년 전 여인의 몸으로 잘못된 봉건왕조 체제를 무너뜨리고 백성들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군복을 입고 전립을 쓰고 칼을 든 여인 용녀는 진짜 세계의 혁명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용녀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를 먼저 꿈꾸고 반드시 만들고자 했던 용녀!
이 여인을 이제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용녀는 혁명에 실패하였지만, 용녀의 후예들인 개딸(개혁의 딸)들은 반드시 검찰과 재벌 그리고 오랜 친미, 친일 기득권과 싸워 승리할 것이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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