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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지 못했는데도 태어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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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 ① 바흐 vs 헨델

이성의 여명이 밝아오던 무렵 영국의 정치학자 홉스는 인류의 세상을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수많은 종교들은 사랑과 자비야말로 신과 인류의 본질이라 가르친다.

가족과 사제관계처럼 끈끈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있는 반면 세상에는 십자군 시대의 십자군 대 술탄 투르크군, 20세기의 나치군 대 연합군처럼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적대관계가 존재한다. 반면 인류의 오랜 역사는 적대관계의 반대쪽에 있는 친분관계도 형성해왔다. 그리고 때로 그 관계는 고정불변이 아니었다. 명분이 아니라 실리가 더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 그 관계는 늘 엎치락뒤치락 달라졌고, 그 관계를 결정하는 사람이나 같은 사람이라도 생각이 바뀌면 관계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적의 적은 친구’라는 명제는 아직도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호된 경험을 하고서야 인류는 자멸적 관계의 위험성을 깨달았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적대가 아닌 경쟁이었다. 경쟁은 스포츠를 통해 규범화한다. 같은 규칙을 가지고 겨루되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여 동일한 행위가 반복가능하게 하며, 개별 경기로는 다투고 경쟁하나 궁극적으로 평화와 우정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고독한 개인의 경기 마라톤에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우승자 또는 우승후보자를 위해 함께 뛰어주며 그의 페이스를 올리거나 유지시켜주는 역할이다. 대체로 스포츠 경기의 세계신기록은 좋은 경쟁자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 기업의 경우에도 독점기업보다는 시장에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비슷한 수준의 경쟁자가 있을 때 빠르게 혁신한다. 카메라의 캐논과 니콘, 휴대폰의 애플과 삼성이 바로 그런 경우다. 역사를 살펴보면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클래식음악도 예외가 아니다. 때로는 비슷한 연령대의 동시대 사람이 서로 경쟁자이자 음악계의 동료였고, 때로는 나이 차이가 있거나 심지어는 몇 세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로 고려되었다. 때로는 한 여인을 두고 경쟁자가 되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작품으로서의 결실을 맺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 음악계의 뒷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요한 제바스찬 바흐 . (출처=위키미디어)

50대 이상의 나이든 세대들은 어린 시절 초·중학교 시절에 대개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라고 배웠다. 일부 일본 책을 보시는 분들은 일본의 초보자용 클래식 음악 입문서에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고 쓰여 있다고 전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바로크 시대 당시에는 별도의 긴 은색 가발을 쓰는 게 정중한 매너의 일부였고, 또 패션의 표현수단이었기 때문에 면도한 얼굴의 초상화만 가지고는 남녀를 구분하기가 동양인의 눈에는 수월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럽에서 가발의 유행은 왕비의 외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탈모가 심해진 루이 13세가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고, 155cm 단신이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키가 커보이고 위엄있어 보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발을 즐겨쓰면서 왕실귀족문화로 정착한다. 그는 때와 장소에 맞춰 매번 새로운 가발을 바꿔쓸 정도였다. 이후 바로크-로코코 시대에는 가발이 정점을 이루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가 연회에 참석하기 전 어떤 가발을 고를까 망설이는 장면이 나온다. 한편, 영국의회에서는 상하 의원의 의장들이, 사법부에서는 판사들이 21세기인 지금도 바로크 시대의 가발을 쓰고 의회와 법정에 등장한다.  

음악사로 보면 바로크시대(1600~1750) 최후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조지 프리더릭 헨델(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은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난 것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두 가지 말고는 같은 점이 없으며, 평생 단 한번도 서로 만나지 못했다. 우스개 소리를 덧붙이자면, 만나지도 못한 두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니, 음악은 역시 처녀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같은 거룩한 출생의 비밀을 지닌 것이었던가? 어떤 사람은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는 그들의 자식이 아니었나 하는 우스갯소리도 했다는 풍문 역시 있다.

두 사람이 만날 뻔한 사건은 있었다. 바흐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헨델을 존경하여 몇 번이나 만나고 싶어 했다. 첫 번째는 1719년 헨델이 오페라 가수를 발굴하기 위하여 고향인 할레(Halle)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는데, 쾨텐(Köthen)에서 계몽군주 레오폴트(Leopold)의 궁정에서 나름 가장 행복한 삶을 살던 바흐는 즉각 불과 6km정도 떨어진 할레로 찾아갔으나 “방금 그가 떠났다”는 숙소 주인의 말을 듣고 돌아와야만 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년 뒤 바흐가 앓아 누워 있을 때였는데, 헨델이 다시 할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흐는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을 보내 정중히 헨델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으나 “일정상 불가능하다”라는 답을 받게 된다. 결국 헨델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던 바흐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조지 프리더릭 헨델.

바흐와 헨델이 연결되는 지점은 또 있다. 1705년, 당시 스무 살이던 바흐는 자기가 살고 있던 튀링엔(Thüringen) 주의 아른슈타트(Arnstadt)에서 무려 300km를 걸어 뤼벡(Lübeck)에 왔다. 그가 뤼벡에 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고 있던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는 17세기 후반 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는데, 당시 그의 오르간 연주는 어느 누구도 따라 오지 못하는 최고의 경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바흐 역시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고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선배의 연주를 듣기 위해 4주간의 휴가를 내고 이곳에 온 것이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는 최고였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바흐는 4주라는 휴가 기간을 훌쩍 넘겨 무려 4개월이나 뤼벡에 머물렀다.

두 번째로 뤼벡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은 당시 유럽 최고의 명기였다. 당시 대다수 악기들의 조율법칙이던 순정률의 한계를 넘어 북스테후데는 자유롭고 대담한 조바꿈을 구사했다. 이 악기를 연주해보는 것은 당시 유럽 오르가니스트들의 소망이었다. 평균 기대수명이 40년 언저리이던 당시 북스테후데는 이미 68세의 고령으로 후임자를 찾는 중이라 그 자리를 탐내는 젊은 오르가니스트들이 많았다. 북스테후데는 이 진중한 젊은이 바흐가 마음에 들어 후임을 삼고 싶어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임자인 툰더(Tunder)의 딸과 결혼해서 이 자리를 얻었던 것을 내세워 북스테후데 역시 자신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이 딸려 있었다. 그런데 10살 연상인 북스테후데의 딸을 본 바흐는 주저 없이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1년 전에도 딸을 보자마자 후보자가 도망간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장본인이 헨델이었다. 결국 후임자를 정하지 못한 채 1707년 북스테후데는 사망한다. 당시 여성의 미모는 모든 남자들에게 그렇게 야망보다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뤼벡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

바흐와 헨델이 이어지는 인연은 하나 더 있다. 1750년 바흐 타계 9년 만에 헨델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안과의사의 수술을 받은 후였다.

당시 두 거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돌팔이 의사는 영국 안과의사 존 테일러(John Taylor). 그는 무리한 작곡으로 시력이 상한 바흐에게 접근하여 낫게 할 수 있다고 비싼 진료비를 받고 수술을 하였으나 치료는 커녕 오히려 완전히 실명하게 만들었따. 바흐는 이 수술 후유증으로 급기야 3개월 만에 사망했다. 테일러는 8년 후에 이 소식을 전혀 몰랐던 헨델에게 다시 접근하여 같은 사기를 쳤고, 그에게 수술을 받은 헨델은 8개월 후 완전히 실명하여 죽게 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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