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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코스모폴리탄' 헨델 vs '로컬리스트'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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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 '바흐 vs 헨델' (2)

바로크 음악 최후의 두 거장 바흐와 헨델은 1685년 같은 해에 같은 나라 독일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 아이제나흐와 할레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다른 삶을 살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둘이 이어지는 지점은 단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헨델이 뤼벡의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후임 자리를 알아보러 1704년 방문했다가 포기했고, 이듬해 바흐가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국의 돌팔이 안과의사 존 테일러에게 안과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바흐는 1750년에, 헨델은 8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바흐는 거의 끝까지 무명 음악가의 삶을 살았지만, 헨델은 젊어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해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왕가로부터 초청을 받는 명예와 부를 누렸다. 그래서 바흐는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 헨델을 존경하여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을 기울였으나 둘의 조우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한적한 독일 동부의 시골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가난한 무명 음악가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명음악가였으나, 200년간 음악가문으로 지내온 집안답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아이제나흐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작센 선제후의 보호 아래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년 바흐의 음악성과 종교적 품성이 어떤 환경에서 길러졌을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바흐..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엔 아버지를 잃었던 바흐는 둘째형 요한 야코프(Johann Jakoff)와 함께 14살 위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가 맡아 기르게 된다. 오르드루프(Ohrdruf)에서 요한 세바스티안은 당시의 대 작곡가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의 제자였던 큰형에게 파헬벨의 스타일을 배운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cob Proberger), 요한 카스파르 케를(Johann Kaspar Kerl),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등 당대 유명 작곡가의 작품 사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어린 동생 세바스티안이 달빛에 의존해서 몰래 필사해가며 공부하다가 형에게 들켰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오르드루프의 교회부속학교에서 세바스티안은 라틴어와 루터교 정통파 신학을 배우는데, 이것 역시 세바스티안 평생의 신념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엔 아이가 생기면 그대로 낳는 통례에 따라 맏형 부부가 아이를 계속 낳으면서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자 세바스티안은 계속 형집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오르드루프 교회의 칸토르(Cantor, 교회 음악감독 겸 부속학교 교장)였던 엘리아스 헤르다(Elias Herda)는 배우기에 열심인 세바스티안을 아껴 독일 북부도시 뤼네부르크(Lüneburg)의 기숙학교에 추천해주었고 15세 때인 1700년 바흐는 성 미하엘(St. Michael) 교회 부속의 미하엘 학교에 입학한다. 가난한 학생을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주는 장학제도를 운영하던 이 학교에는 어린 바흐에게 엄청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보가 귀하던 시기에 저명한 작곡가 175명이 작곡한 악보 1102곡이 소장되어 있어 당시 독일에서도 손꼽힐 만한 규모의 음악도서관이 있었던 것. 세바스티안은 이곳에서 뤼네부르크 성 요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게오르크 뵘(Georg Böhm)의 음악을 접하며 오르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더해졌고, 함부르크(Hamburg)를 방문해 빈센트 뤼벡(Vincent Lübeck)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한편 당시 뤼네부르크의 영주 게오르크 빌헬름(Georg Wilhelm) 공작은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고 궁정악단도 운영했는데, 여기서 세바스티안은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이나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와 니콜라 드 그리니(Nicola de Griny) 같은 저명한 프랑스 음악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1702년 4월 바흐는 성 미하엘 학교를 졸업하지만, 대학에 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직업 일선에 나가야 했다. 아이제나흐와 장어하우젠(Sangerhausen)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고, 이듬해인 1703년 1월에 작센 바이마르(Sachsen Weimar) 공국 요한 에른스트(Johann Ernst) 3세의 궁정악단에 바이올린/비올라 주자 겸 시종으로 취직한다. 이때 당대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파울 폰 베스트호프(Johann Paul von Westhoff, 1656–1705)를 만나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의 작품을 중심으로 열심히 배운다. 그해 여름 아른슈타트(Arnstadt)에 있는 성 보니파치우스(St. Bonifacius) 교회의 새 오르간 시연에서 행한 연주에 반한 교회 측의 요청으로 바흐는 공식적인 첫 직책을 맡는다. 

이후 바흐는 뮐하우젠(Mühlhasen), 바이마르, 드레스덴(Dresden)을 거쳐 쾨텐(Köthen)에서 기악음악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마지막 라이프치히(Leibzig)에 이르러 교회음악의 위대한 완성을 성취하지만 일생 독일 바깥으로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자신이 살던 도시 밖으로 여행을 나간 것도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듣거나, 일자리를 위한 연주와 면접 등 철저하게 음악적인 이유였다. 그는 음악가 중에 보기 드문 로컬리스트였다.

반면에 헨델은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와 같은 작센(Sachsen) 주에 속한 중부 독일의 산업과 교육 중심지인 할레(Halle)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발사 겸 궁정 외과의사인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Georg Händel)이 당시로서는 할아버지 나이인 63살에 무려 29살 연하의 후처에게서 얻은 늦둥이였다. 소년 프리드리히는 10살이 되기 전 아버지의 고용주인 작센 바이센펠스(Sachsen Weisenfels) 공국의 제후 요한 아돌프(Johann Adolf) 공작에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아 오르가니스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홉(Friedrich Wilhelm Zachow)에게 배우게 된다.

아리아 '울게 하소서'의 당시 출판 악보

공작의 후원 아래 11세 때에는 베를린(Berlin) 궁정을 찾아가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Malachia Ariosti)에게서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을 배우기도 하는데, 아버지는 음악이란 오락에 불과하고 생활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해 반대했다. 1697년 75세로 장수한 아버지는 죽기 직전 헨델에게 '법관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프리드리히는 일단 할레 대학의 법학과에 진학하지만 이내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들어가며 13살에 일찍 여읜 아버지를 배신(?)하고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다 1703년 18살 때 뤼벡에 가서 당대의 노거장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를 만나 그에게 음악을 배우는데, 그를 탐낸 칠순 직전의 늙은 스승은 헨델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조건이었던 딸 마르가리타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떠난 헨델은 할레를 떠나 당시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였던 함부르크 등을 다니면서 요한 마테존(Johann Matheson)이나 라인하르트 카이저(Reinhardt Kaiser) 같은 작곡가들과 친해져 함부르크 오페라하우스의 바이올린 주자로 취업하면서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20살에 첫 오페라 <알미라(Almira)>를 작곡한 헨델은 21살이 되던 1706년에는 본격적으로 오페라와 극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아예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707년 피렌체에서 헨델의 첫 이탈리아어 오페라인 <로드리고(Rodrigo)>가 성공을 거두면서 작곡가로서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1709년 로마를 방문해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연을 벌이며 더욱 유명세를 얻는다. 

1710년 헨델은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서부 독일 하노버(Hanover)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Georg Ludwig)를 만나 겨우 25살에 하노버 공국의 음악 총괄책임자인 궁정악장이 되었고 휴가를 얻을 때마다 바다 건너 런던(London)을 방문한다. 두 번째 해인 1711년 2월 런던에서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로 유명한 오페라 <리날도(Rinaldo)>가 15회나 상영되는 등 대성공을 거두면서 런던에서도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고 영국 왕실의 관심도 얻게 되었다.

1713년 <앤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와 위트레흐트(Utrecht) 조약을 축하하는 <테 데움(Te deum)> 등의 연이은 히트로 런던에서의 성공을 확신한 헨델은 하노버로의 귀환 약속을 어기고 영국에 정착해 버린다. 그는 독일식 이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을 아예 영국식으로 조지 프리더릭 헨델(George Frederic Handel)로 바꿔버린다.

1717년 조지1세의 뱃놀이 대 연주된 헨델의 '수상 음악'

그런데 하필이면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1714년 사망하고, 왕위계승논쟁 끝에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바로 그 하노버 선제후(選帝候)가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1717년 조지 1세가 영국을 방문하자 그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수상 음악>을 만들어 조지 1세의 템즈강 뱃놀이 때 연주함으로써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일화는 신빙성을 의심 받고 있다. 괘씸죄 대신 오히려 왕의 신임을 얻는 뒤집기 신공을 발휘하여 궁정악장으로 임명된 헨델은 왕의 보좌관 역할을 하며 정치에도 관여하는 등 영국 내에서 음악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또 대단한 실력자로 대우받았다.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에 정착한 그는 작곡가로서의 유명세와 경제적 부유함을 동시에 누렸다. 자신의 작품이 유럽의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공연되는 것을 보거나 지도하러 정착지 런던에서 대륙으로 자주 건너왔고, 그렇게 국경을 넘는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았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 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칼럼을 쓰고, 강의·방송 출연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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