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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카스트라토가 될 뻔한 소년 하이든 vs 글로벌 천재교육 모차르트

by 뉴스버스1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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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2- '파파 하이든 & 신동 모차르트'(1)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살펴볼 때 1600-1750년으로 경계 짓는 바로크는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두 개의 음악형식을 창조해냈다. 하나는 ‘오페라’(opera)이고 다른 하나는 ‘소나타’(sonata)다.

지난 1997년 오페라 탄생 400주년의 떠들썩한 행사가 전세계에서 치러졌다. 기록상 1597년 피렌체의 ‘카메라타 데 바르디’라는 소모임에서 자코포 페리(Jacopo Perri)가 <다프네(Daphne)>를 상연한 것이 최초이나, 악보가 남은 첫 오페라는 페리의 <에우리디체(Euridice)>(1600년)이고, 첫 히트작이자 아직까지도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1607년작 <오르페오(Orfeo)>다. 이로써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후 오페라는 전유럽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간다.

두 번째 장르는 소나타다. 소나타의 원형은 16세기 초 프랑스의 세속 성악곡인 샹송(Chanson)이다. 성악 멜로디와 류트나 바이올린 등 아주 간단한 두세 악기의 반주로 이루어진 이 형식이 이탈리아에 전해지고, 악기로 연주되면서 싹튼 것으로 본다. 이 샹송 형식으로 된 오르간이나 기악합주 형식은 17세기 중엽 종교개혁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주로 만들어진다. 소나타라는 용어는 이후 베네치아에서 성악을 위한 칸타타(Cantata)와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탈리(Vitali)와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 등에 의하여 성악이 빠진 기악만으로 된 교회 소나타가 성립되었고, 이것이 프랑스와 독일로 전해지면서 실내 소나타가 생겼다. 두 가지 소나타는 서로 영향을 받다가 하나로 융합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소나타가 탄생한다. 

초기 소나타의 상당수는 트리오 소나타인데, 첼로의 조상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와 피아노의 조상 하프시코드(또는 오르간)로 구성된 저음부와 멜로디를 담당하는 고음부를 포함하는 3성부로 되어있다. 소나타는 후기 바로크 작곡가들에 의해 독주 소나타와 합주 소나타로 발전하다 고전시대의 하이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이르러 형식과 내용이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 오늘날 교향곡이라 불리는 관현악 소나타는 통상 4개 악장으로 구성되고, 오늘날 협주곡이라 불리는 독주악기와 관현악으로 구성된 3악장, 건반악기 독주나 피아노 반주가 붙은 솔로악기 소나타는 빠르고 느리고 빠른 3악장이 가장 합리적인 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카스트라토가 될 뻔 했던 가난한 소년 하이든

‘교향곡의 아버지’란 별명을 가진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f Haydn1732-1809)은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 동쪽 로라우(Rohrau)라는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 마티아스(Mathias)는 마차바퀴를 만들고 마차를 수리하는 전문가였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는 교향곡의 할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해 민속음악을 잘 알았고 하프 정도는 연주할 줄도 알았다. 어머니는 귀동냥으로 음악을 즐긴 귀족가문의 요리사 출신이어서 집안은 늘 음악이 있었다고 한다. 위로 누나 하나를 둔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파파 하이든’은 6살에 음악재능을 발견한 아버지에 의해 로라우보다 조금 더 큰 근처 소도시 하인부르크(Hainburg)의 교사 겸 합창장이었던 고모부 뻘 친척 프랑크(Johann Matthias Frankh)에게 맡겨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거의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처럼 부려졌다고 하는데, 그나마 그렇게라도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요제프는 그 이후 다시는 가족과 만나지 못했다. 

빈 성슈테판 성당

그가 보이소프라노를 하던 하인부르크(Hainburg) 교회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지나가다 들른 폰 로이터(Georg von Reutter)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의 성 슈테판 성당(St. Stephen's Cathedral in Vienna) 음악감독이었다. 소년 하이든의 노래를 들은 그는 오디션을 제안했고 당연히 합격한 소년은 1740년 8살에 빈으로 이주해 교회 부속학교에서 라틴어와 성악, 바이올린, 건반악기를 배운다. 9년동안 다른 4명의 소년합창단원들과 함께 폰 로이터의 집에 얹혀사는 동안 1741년에는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장례 미사에서도 노래한다. 5년후 동생 요한 미하엘(Johann Michael Haydn 1737~1806)도 폰 로이터의 식객 겸 성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미하엘은 1762년에 잘츠부르크로 가서 장장 43년을 활동하고 68세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당시 성 슈테판 성당은 유럽의 음악을 선도하는 곳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하이든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음악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은 고달팠다. 나중에 전기작가에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언제나 배고파서 늘 외부 귀족들의 초청공연에 나가고자 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

폰 로이터는 하이든의 아버지에게 오페라 무대에서 수요가 높던 카스트라토(castrato/남성 거세 가수)를 만들면 돈과 인기를 한꺼번에 얻을 것이며, 어릴수록 고통도 적고 성공 가능성도 높을 거라고 꼬드긴다. 소년기의 막바지였던 하이든도 가난한 집안 사정을 알고있는데다 노래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이 제안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소년을 작업대 위에 결박한 거세집행인이 도끼를 쳐들었을 때 도저히 아들을 성불구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지막 결단이 그를 살린다. 당시 카스트라토 거세의 생존율은 절반 이하였다. 

성 슈테판 성당에서는 변성이 되어 소년합창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 변변하지 않더라도 숙식이 제공되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1749년 드디어 변성이 찾아와 아름다운 고음을 낼 수 없게 된 하이든이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황제 앞에서 노래한 날, 하이든 형제를 사랑해왔던 여황제는 폰 로이터에게 혹평을 했다. 그날 하이든은 18살에 생전 처음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바로 숙소에서 쫓겨났다. 갑자기 직업음악가의 길로 내몰린 하이든은 음악교사, 거리의 세레나데 연주자 등을 전전하다 1752년 이탈리아 작곡가 포르포라(Nicola Porpora)의 피아노 반주자가 된다. 성 슈테판 학교에서 폰 로이터는 그에게 작곡 레슨을 딱 두 번 무성의하게 해주었는데, 하이든은 그와 일하면서 작곡의 세계를 접했다. 푹스(Johann Joseph Fux)의 대위법과 C.P.E.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의 작품을 연구했고, 헨델과 결투할 뻔했던 마테존(Johann Mattheson)도 공부하며 음악 전반을 익혔다. 음악이론과 작곡법이 단단하게 만들어지자 그의 음악도 서서히 빈 음악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마침내 안정된 직장을 얻기까지 하이든은 청년기에 거의 10년의 세월을 고생하며 지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 앞에서 연주하는 모차르트

음악사상 유일무이한 글로벌 천재교육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미하엘 하이든이 부임하기 6년전, 알프스산맥에 인접한 오스트리아 서부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궁정악단 제4악장인 레오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의 3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러나 위로 다 일찍 죽어 누나인 난네를(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통칭 Nannerl, 1751~1829) 하나만 살아남았다. 볼프강은 걸음마 시절부터 누나 난네를이 아빠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음악과 수학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3살에 피아노를 배우고 4살에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5살에 첫 작곡을 했다. 6살에는 누나와 함께 연주여행을 시작했는데, 20살이 되기 전까지 4번에 걸쳐 총 6년에 이르는 길고 긴 연주여행을 통해 천재성이 더욱 발휘된다. 

첫 번째 여행에서 6살 꼬마 모차르트는 뮌헨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Maximillian III)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Schönbrunn) 궁전을 방문해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피아노를 내려오다 넘어졌고 한 살 많은 마리 안토니아 공주가 일으켜 세워주었다. 무릎에 어린 예술가를 앉힌 여황제가 소원을 묻자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물론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정략결혼에 의해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어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당하는데, 모차르트는 이미 2년전에 사망해서 그녀의 참혹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모차르트 일행은 이어 프라하를 방문했다. 

1차 여행이 신동 모차르트를 소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듬해 시작된 3년 반짜리 2차 여행은 모차르트가 좀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장차의 성공을 모색하려는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다. 2차 여행은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헤이그를 거친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면서 파리, 취리히, 도나우어싱엔, 뮌헨을 거쳤다. 다행히 당시 잘츠부르크 영주였던 대주교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Graf von Schrattenbach)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으로 모차르트 일가가 잘츠부르크를 빛나게 한다며 길어진 여행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여행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지역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가족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볼프강은 파리에서는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이후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던 폰 그림 남작(Baron Christian Friedrich Melchior von Grimm 1723-1807)과도 인연을 맺었다. 특히 1764-65년 8살 때 런던에 머무를 당시에는 위대한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에게 배우며 최초의 교향곡도 작곡한다. 당시 런던의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 1720-1782)에게 성악도 배웠는데, 그는 성악에서도 뛰어나 변성기 전까지는 종종 교회와 공연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

1767년 빈으로 가자마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에 모차르트 남매도 감염되어 고생하다 다행스럽게  회복했다. 이번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곡에 큰 관심을 보였다. 빈대학 교수 메스머(Franz Anton Mesmer)에게 의뢰받아 작곡한 1막짜리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50)>가 소극장에서 공연됐다. 하지만 궁정에서 일도 안하는데 월급을 주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대주교가 1768년 지급을 중단하자, 모차르트 가족은 부랴부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대신 대주교는 12살의 모차르트를 궁정악단의 수석연주자로 임명했다.

1769년 12월에 떠난 여행은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했는데, 여행에 지친 엄마와 음악교사로 직장을 얻은 누나 난네를이 빠지고 아빠와 아들만 떠났다. 3년에 걸친 이 여행 덕분에 모차르트는 훗날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여행 첫 해 볼로냐에서는 당시 유명 오페라 작곡가였던 미슬리베첵(Josef Mysliveček 1737-1781)과 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 신부를 만나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천재성을 인정한 마르티니 신부의 주선으로 원칙적으로 20살 이상의 작곡가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의 회원이 된다. 이듬해 로마에서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연주된 알레그리(Gregorio Allegri)의 합창곡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를 2번 듣고 그대로 악보로 적어냈다. 이 곡은 당시 바티칸에서 유출시킬 경우 파문에 처할 정도로 소중한 보물이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Clement) 14세는 겁없이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 소년을 파문으로 처벌하는 대신, 칭찬과 함께 황금 박차 기사단(Chivalric Order of the Golden Spur)의 명예로운 칭호를 하사했다. 

이해 밀라노에서는 14살 짜리 소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87)>가 공국의 국립극장(Teatro Regio Ducal)에서 초연되어 무려 21회나 상연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덕분에 모차르트는 이 극장에서 주기적으로 작곡을 의뢰받아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K.111)>, <루치오 실라(Lucio Silla K.135)> 같은 오페라들을 작곡해냈다. 이를 계기로 밀라노의 통치자이자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었던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erdinand Karl of Austria-Este, Governor of the Duchy of Milan)이 모차르트를 궁정음악가로 고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1773년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때는 음악을 이해하던 폰 슈라텐바흐가 2년전 사망해 대신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Hieronimus Coloredo)백작이 잘츠부르크 대주교 겸 영주가 되어있던 때였다. 그때로부터 모차르트의 수난이 시작된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레오폴트와 피아노를 치는 모차르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음악을 하기 위해 친척 프랑크와 스승 폰 로이터에게서 아동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카스트라토가 될 뻔한 위기를 겪었던 하이든. 그는 변성기로 성 슈테판 성당 소년합창단에서 쫓겨난 후 포르포라에게 가서야 비로소 작곡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이후 10년간에 걸쳐 고생하며 자신의 음악을 쌓아나갔다.

반면 모차르트는 태어났을 때 아버지 레오폴트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교수법 책을 쓴 정상급 교사였다. 아들의 재능을 쓸데 없이 학교에서 낭비하지 않으려고 그는 홈스쿨링으로 고전과 라틴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상류층의 예절 등을 모두 가르쳤다. 정규교육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모차르트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마침 모차르트가 6살 때 미하엘 하이든이 잘츠부르크에 부임하여 아버지 외에도 전문적인 사사를 받을 수 있었고 삼촌 조카 사이처럼 지냈다. 

청년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이자 작곡가, 그리고 음악의 대선배인 하이든과의 만남을 통해 모차르트는 “현악사중주의 참된 방식을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24살 많은 하이든을 ‘파파’라고 부르며 따랐고, 하이든은 젊은 작곡가의 뛰어남에 대한 극찬을 평생 아끼지 않았다. 자신보다 어린 모차르트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하이든은 “후세는 100년 이내에 그와 같은 천재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며 깊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35년의 생애동안 3,720일, 즉 10년 2개월 2일 동안의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잘츠부르크를 떠나 독립하기 이전의 여러 차례 여행에서는 유명한 신동을 보기 위해 가는 곳마다 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 모차르트의 연주를 본 그 도시 최고의 음악가들이 그에게 자신의 수법들을 전수했고, 모차르트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모차르트는 본인의 천재성과 노력 외에도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도시마다 그에게 천재교육을 아낌없이 베푼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신의 사랑을 받은 자(amadeus)이기도 했지만.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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