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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바다에 꽃송이가 부유하다 - 정영한 작가

by 뉴스버스1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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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정영한의 시그니처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꽃송이가 공중에 부유하는 풍경은 감성이 배제되어 있으며 분절된 이미지의 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우리 시대 신화 162.1*112.1cm oil on canvas 2006년 / 사진 제공 = 정영한 작가

필자는 정영한 작가의 작품을 보며 두 명의 근현대 미술가를 떠올렸다. 꽃을 즐겨 그린 체코 작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6)와 텍스트를 대상으로 삼은 미국 작가 바바라 크루거(Babara Kruger, 1945~ )이다.

알폰스 무하는 1차 대전 이전 세계의 중심지이며 평화 시기를 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한 벨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대')의 체코 출신의 장식 예술가이다. 무하는 1894년 연극 빅토리앙 사르두의 '지스몽다(GISMONDA)' 포스터 작업을 맡았다. 무하는 당대의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연기한 지스몽다를 성직자와 같은 자세로 그리고 후광을 넣어 천상의 고귀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포스터의 크기(210×68cm) 덕에 배우가 입은 가운의 길이가 체감된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기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예술 사조 아르누보 시대, 무하가 즐겨 그린 '꽃'은 단순히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마치 여성의 몸 일부분이 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무하스타일(Le style Mucha)'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들은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 등 현대 일본의 만화 화풍에 영향을 주었다.

이미지시대의 단상 112.1*162.1cm acrylic on canvas 2020년

정영한은 일본 만화가인 타케우치 나오코가 1990년대 만들어낸 ‘세일러 문’을 단어 ‘justice(저스티스)'와 함께 표현하였다. 세일러 문은 악당들과 대적해 싸워나가는 캐릭터이다.

정영한의 꽃 이미지는 알폰소 무하와 달리 전체 화면에서 이미지의 층위를 만들어내는 구성 요소로서 쓰일 뿐이다.

정영한은 대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금속 조각에서 표면의 광택을 극대화한 슬릭테크(slick-tech·반질반질하게 만드는 기술)와도 같이, 캔버스 자체를 편평하게, 딴딴하게 하는 게 특징이다. 작가의 감정이 묻어나는 붓질을 없애기에 가능하다. 사각의 캔버스가 아닌 원 캔버스는 평면회화에 속하지 않는다. 놓여지는 공간과 조명에 따라 입체 및 설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작품 설치 장면 / 사진 제공 =정영한 작가

현대 미술에서 텍스트를 읽는 대상에서 보는 대상, 즉 이미지로 삼은 이는, 고전문학과 그리스·로마 신화, 역사를 주제로 그린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 ~2011)와 함께 바바라 크루거가 있다. 크루거는 흑백 이미지와 붉은 프레임, 강렬한 텍스트를 특징으로 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상징적 서체와 간결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는 동시대 사회의 메커니즘과 권력, 욕망, 소비주의, 젠더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붉은 사각형 프레임 안에 적힌 'I shop therefore I am(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당신 몸은 전쟁터다)'와 같은 명료한 슬로건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미지-시대의단상 ; ICON 72.7*90.9 cm acrylic & oil on canvas 2020년

크루거의 메시지는 문장으로서 완결성을 갖는 반면 정영한은 단어로 표현된 사실의 나열에 중점을 둔다. 크루거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사용하여 관객에게 직접 그 의미를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반면 정영한은 여전히 시각 이미지가 주인공인 캔버스에 문자 언어를 끌어들여 작품과 작품간,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맥락을 가진 작업의 지점을 만들고 있다.

분절된 이미지의 배치

그의 작품의 이력을 좇다보면 화면 속 대상과 대상간 분절뿐 아니라 생경한 이미지와 이미지, 프레임 속 또 다른 프레임과의 분절이 특징이라는걸 알 수 있다.

그는 작가의 길을 일찍 걸었다. 1995년 대학 4학년 때 MBC 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다음해 1회 개인전을 가진 이후 줄곧 미술 경기가 껶일 때인 2010년까지 소위 시장 작가로 성가를 높였다.

인간의 굴레로부터 일탈 213.9*133.3 acrylic & oil on canvas 1995년

1996년 `인간의 굴레부터의 일탈' 시리즈 등은 서로 다른 이미지의 회화를 모자이크(mosaic)기법으로 모았다. 다른 관점에서는 도시의 정서와 경관 이미지들이 통합되지 않고 분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니터 안에 가두어져 있는 바다는 작품 속 화자가 당도해야 할 곳임을 암시한다. 

현대인-문명과 자연 162.1*130.3 wood object+oil on canvas 1999년

2002년 성곡미술관 전시부터 꽃과 문자를 화폭에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정영한은 2005년부터 10년 이상 <우리시대 신화> 시리즈를 지속해 왔다. 바다를 배경으로 꽃, 석상 등 다양한 이미지를 합성하였다.

우리시대 신화 40.9*53.0 object + acrylic on canvas 2004년

2008년 미술평론가 유재길은 정영한의 화면 속 분절을 회화적 장치로 이해했다.

"좌대 없이 바닥에 놓여지는 박스형태의 프레임과 몇 개로 분절되어 잇대져 있는 화면, 그려진 부분과 만들고 얹혀 놓은 오브제, 물질들의 연출 및 그림과 문자의 오버랩 등이 그 두드러진 형식적 장치들이다."

그는 2010년 대학 전임 교원이 되면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겪는 생업의 문제에서는 일찍 자유로워졌다. 한국 사회는 직업 작가와 대학교수를 겸하는 작가와의 구분에 있어 편견과 선입견이 따른다. 

작품은 작가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다만 예술가는 정신적으로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는 끊임없는 욕망을 가져야 할 뿐이다. 

우리시대 신화 60.9*90.9 oil on canvas 2012년

2017년 이후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는 이미지와 단어를 화면에 함께 조합해 놓았다. 실재가 없고 가공된 숱한 이미지들이 떠도는 디지털 사회에서 정영한은 가상의 이미지 만드는 방식을 회화로 보여준다. 상실(LOST)’등 특징적인 단어가 너무 지시적이라는 우려에 대해, 화폭속 그냥 이미지로 자리시켰다고 말한다. 

정영한의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에서 채택하고 있는 키워드에는 대부분 하나의 이미지만 등장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문자와 이미지 사이에는 특정한 의미 구조가 주어져 있지 않다. 그 둘 사이에 관계성을 찾으려는 관객들의 드라마를 무너뜨린다.

2020년 8월 전시 ‘이미지-시대의 단상(Image-Fragment of the time)’은 우상, 각 시대의 아이콘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상징들을 연결시켜 보여준다.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이 뉴욕 첫 개인전 때 선보인 브릴로 상자(Brillo Box·1964년)들은 나무상자 표면에 색을 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상품 로고를 찍어 만들었다. 사람인 주체(subject)가 대상(object)에 따라 규정되는 인간 상실의 시대를 비틀었다.

비평가 아서 단토 (Arthur C. Danto. 1923 ~ 2013)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 ‘무엇이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논쟁을 촉발, ‘예술의 종말’이라는 논쟁적인 선언을 했다.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제약이 모두 사라졌으며 이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정영한은 그러한 브릴로 상자 이미지를 가져왔다. 지나간 시대의 아이콘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이모티콘으로 변해, 새로운 시대를 안내하는 기호로도 작용한다. 

정영한은 이미지는 포스터 같은 프레임과 슬로건 같은 텍스트에 갇혀있다고 본다. 브릴로는 지나간 시대의 신화가 되었고 아이콘이 되었다. 

시대의 단상-Image of Myth 60.6*90.9 acrylic & oil on canvas 2022년

한편으로는 회화가 거대 서사에 동원되기 보다는 작가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보여주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작가가 그렸던 도시는 느리고 흐릿한 영상 속의 그림자나 허상으로 다가온다. 그리드와 둘러싼 장치들, 도로, 차, 조명 등과 고가, 빌딩들이 있는 풍경이 차갑고 무겁게 흐른다. 

꽃은 이런 도시 공간에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물 이미지도 같은 맥락을 형성한다. 그에게 물은 안식처와 같다. 영화 <조스>에서 보듯 물이 상어와 같은 거대한 힘이 지나는 통로가 아니라 햇빛이나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는 잔물결인 '윤슬'을 말한다.

동시대 미술의 아이콘인 1960년대 뉴욕의 브릴로 상자와 2000년대 한국의 꽃송이가 올라간 브릴로 상자는 정영한의 화면 속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분절되어 있기도 하고 시간대와 공간이 연결되어 통일성을 갖춘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자이크 맥락 속에 있기도 한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아티스트 신화 시리즈 중, 드로잉 작품이 없는 몇몇은 정영한이 서명한 드로잉을 그들의 이름 이미지와 함께 오마주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미지-시대의단상; ICON 57*76 acrylic on pigment printed paper 2019년

일상의 사물들이 그의 작품에서는 비일상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화폭 속 공간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가 말한 비일상(非日常)·한시적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이다. 실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곳이다.
공간-존재의 한계를 위반하는 반공간,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가 현실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졌을 때 드러나는 균열과 틈새를 직시하게 해준다.

지난 10일, 인터뷰를 위해 처음으로 방문한 중앙대 안성캠퍼스는 정문에서 본관으로 이르는 도로 양쪽 길은 장마철의 수분을 머금은 제법 수령이 오래된 숲 길이었다. 작가의 캔버스 속 공간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정영한이 택한 모티프들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선택들이다. 관객의 시선을 통해 작품 속에 투영된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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