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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심정택의 미술 딜라이트 / 심정택 칼럼니스트

by 뉴스버스1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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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작가 박춘숙의 영혼, '보리와 억새' - (상)

 

10여 년 전 갤러리 사업을 준비하면서 찾은 경남 진해 바닷가에서 생애 처음 맞닥뜨린 도요(陶窯)는 미술과 신비의 경계를 본듯했다.   

5년 전 교류를 하기 전 부터 받아든 카탈로그에 소개된 응향(凝香) 박춘숙 작품은 남성적이고 스케일이 컸다. 사발, 주전자, 접시, 화병 등 스펙트럼이 넓다. 표면에 아름다운 선홍색 무늬를 연출하는 진사 도자기와 다완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이다.

영암 논흙 안화문 만화방 대접시 각 지름 45cm 2018년. / 사진 제공= 박춘숙 작가

2년 전 봄, 나는 횡성 응향원을 세 번째 방문하고서야 비로소 보리는 대체로 꼿꼿이 서고, 억새는 누워 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달이 요요(耀耀)한 봄날의 흔들리는 보리를 표현하고 싶었다. 보리들은 제각각 춤추는 그대로 모습이어야 했다. 

작가에게 보리는 노스텔지어이며 순수하던 시절의 동심을 표현한다. 박춘숙은 1960년대 중반 아버지 손을 잡고 전북 전주에 당도하였다. 초등학교의 도시락은 평등하였다. 학교에서 도시락 검사를 하기에 가족도 보리에 쌀 한 줌 넣은 혼식을 해야했다. 보리는 고단한 시대를 지탱해준 음식이었다.  

귀두 천목 보리 음각 대웅 120kg 2018년.  /사진 제공=박춘숙 작가

칠흑같은 밤 산등성이, 언덕 길모퉁이 언저리에 제멋대로 모여 있는 억새의 고즈넉한 쓸쓸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는 달밤의 흑갈색을 표현하기 위해 유약과 불 조절에 애를 쓰며 밤을 지새웠다.

보리와 억새는 대지를 캔버스 삼은 미술가이자 플로리스트(florist)인 박춘숙의 시그니처이며 상징이다. 달빛 아래 바람에 춤추는 사유(思惟)의 시원(始原)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억새와 보리를 유약 바른 도토(陶土) 표면에 새겨 넣을수 있다.

박춘숙은 도끼로 장작을 패고, 도편을 깨 연구하고, 흙 단층을 찾기 위해 절벽을 탄다. 달 밝은 가을 밤이면 도토리를 주으러 응향원 초입 삼형제봉 고샅을 전등 하나 들고 돌아다닌다. 도예가의 정체성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플로리스트와 만나 젊은 시절, 꽃그릇(花器) 분야에서 성공을 가져다 준다. 

부친은 도자기와 옹기를 구분하지 않았다. 중학 시절까지 딸을 전북 김제와 인근 지역의 옹기 가마터로 데리고 다녔다. 옹기는 음식물 저장을 위한 일상용품으로 독과 항아리를 말한다. 

박춘숙은 1970년대 중반 고교 시절에야 경기도 여주 도자기 가마를 접했다. 여기서 본 작은 막사발을 마음속으로 품었고, 그 씨앗은 싹을 피워 올려 지금의 ‘대웅’ 시리즈로 완결되었다.    

박춘숙은 음대 입학하면서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디바를 꿈꾸었다. 부친의 불행한 죽음은 그녀에게 미성의 목소리를 앗아갔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꽃꽂이 강좌를 선택 과목으로 삼은 게 플로리스트의 길이었다. 전공을 법학으로 바꾸어 졸업했다. 

도자기는 통계와 데이터의 산물이다. 박춘숙은 일본 자료들을 뒤졌다. 소지(흙), 산화법, 환원법, 소성 온도, 시간 등을 고민했다.  

소성의 흔적으로 부분부분 투박한 하얀 결로 남은 단면은 마치 매화가 만개한 듯하다. 뒤집으면 ×구멍이 이쁜 작품이 나온다. 일본 시장에서 특히 호평 받는다.

주천강변 쪼대흙 버드나무재유 다관 2018년 / 사진 제공= 박춘숙 작가

도자기는 현대 미술이 갖고 있는 테크놀리지가 모두 들어가 있다. 파장이 다른 색, 빛, 온도에 따른 컬러의 변화, 파낸 홈에 다른 흙으로 메우고 유약을 바르는 과정은 조각적이며 회화적이다. 조각과 회화의 어울림은 칼질과 붓질이 어울려야 한다. 도자기는 가장 일차적인 조각이다. 그 여백과 매스(덩어리) 조각을 하다보면 공간과 여백을 알게 된다.

1992년, 서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기 위해 런던에서 바꿔탄 비행기 옆 좌석에는 김대중(후일 대통령)이 있었다. “니혼진데스까?”(日本人ですか?) “아뇨, 과천 사는데요” 박춘숙은 과천에 스튜디오를 두고 단국대, 홍익대 등 각 대학 도예과를 다니며 꽃그릇(花器) 창작 강의에 바쁠 때였다.

만혼이 일반화하지 않았던 성장 시대의 끝물, 취집(취직+시집)이라는 말이 유효했던 젋은 예비 신부들에게 꽃꽂이는 갖추어야 할 필수 교양이었다. 도자기를 활용한 꽃꽂이 강의는 늘 만원이었다.    

그들이 향한 네덜란드는 화훼가 수출 전략산업이다. 김대중은 플라워 디자인 1급 자격증을 가진 박춘숙에게 물었다. “국내에서 화훼박람회를 할 수 있는가요?” “국제적인 꽃박람회 유치를 위해서는 사전 유치 전략이 필요합니다”  

당시 대세였던 침봉에 꽂는 동양식 꽃꽂이를 공부하러 네덜란드 HANK 플라워 칼리지에 다닐 때 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 날 암스테르담 꽃박람회를 안내한 게 정치인 김대중과의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1996년 개최된 고양세계꽃박람회는, 경기도가 일본 도쿄, 중국 쿤밍(昆明)과의 국제꽃바람회 유치 경쟁에서 탈락한 후 자체적으로 출범시킨 이벤트였다. 박춘숙은 조직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했다. 

박춘숙은 '세계 도자기엑스포1998 경기도' 특별 자문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고양세계꽃박람회를 경험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이권단체의 개입을 막았고, 예산의 집행 및 감독을 하였다. 엑스포는 600만명이 관람,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주는 산업용, 이천은 작가주의, 광주는 실험적 작품을 만드는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졌다. 

조선 왕실은 15세기 중반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도자기 제작지로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두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도자기를 만들었다. 도자기에는 용과 모란 무늬를 장식하여 왕실의 위엄을 나타냈고, 바닥에는 사용처나 제작년도를 표시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초벌 가마에서 나온 보리억새 음각 달항아리 80kg. / 사진 제공 = 박춘숙 작가

박춘숙은 조선 왕실의 전통인 백자에 도전하였다. 대중화를 고려, 무늬를 전사(轉寫)로 찍어 브랜드까지 붙였다. 

1998년 DJP연합으로 들어선 김대중 정권은 경기도가 가졌던 꽃 박람회 개최권을 2002년 충남 안면도로 양도하고 만다. 순전히 정권의 한 축인 김종필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한국 도자기산업 및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임창열 경기도 지사가 당초 계획한 광주-여주-이천의 세 축으로 가져갔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토로한다. 

그녀의 젊은 시절 성공을 가져다 준 꽃그릇(花器)은 도자기 장르에 속한다. 도자기는 매병(梅甁)과 주병으로 나뉜다. 주병은 목이 길고 매병은 아가리가 넓다. 꽃그릇은 매병을 기본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한다. 조선 왕실에서도 쓰였던 요강은 매병에 속한다. 달항아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왕실 의례에 사용한 백자 항아리는 술을 담기도 하지만 비단으로 만든 꽃(綵花)을 꽂는 데 사용하였다. 몸체에는 구름과 용을 그렸다. 숙종의 기로소 입회를 기념하여 제작한 서첩(耆社契帖 1719년. 숙종 45년. 보물 제639호)의 행사 그림을 보면, 건물 밖 기둥 양 옆에 놓은 용무늬 항아리의 모습이 확인된다. 

근대로 거슬러 가면 매병을 활용한 꽃꽂이는 문화계 전반에 보편화 되었다. 김환기(1913~1974), 권옥연(1923~2011) 등의 정물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2007년 이후 수년간 영국을 다녔다. 노인 복지 교실에서 꽃꽂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으나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절친의 죽음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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