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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홋카이도, 이 섬이 수상하다

by 뉴스버스1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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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광용 에세이스트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천황이 있는 입헌군주제의 일본에 대통령이 통치하는 공화국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거의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대통령의 통치 기간은 5개월에 불과했고 공화국 영토는 일본 전역이 아니라 북쪽 한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1869년 1월에 건국해 6월에 멸망한 나라입니다. 그 국가의 이름은 에조 공화국이었으며 그의 영토는 홋카이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는 야경이 아름다운 항구 하코다테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실각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휘하의 막부파 군사들이 유신 세력에 반발하여 일으킨 보신전쟁(1868~1869)의 와중에 생긴 일로 중앙 정부군에 의한 에조 공화국의 멸망으로 이 전쟁도 끝나게 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1884년 개화파가 일으켜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과 같은 성격의 사건일 것입니다. 세습형 절대지존 쇼군을 떠받들던 군인들이 민주주의의 절차인 투표로 대통령까지 선출한 이 에조 공화국 사태로 홋카이도는 일본 역사상 잠깐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둘레가 50km에 달하는 홋카이도의 아름다운 도야 호수

친구들과 사석에서 일본 관련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가볍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홋카이도가 제주도보다 클까? 작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자리는 일순 긴장감이 살짝 돌며 짧은 침묵이 이어집니다. 뻔히 아는 질문도 막상 누가 물으면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뻔한데 질문에 무슨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시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당연히 홋카이도가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거의 모두 알고 있습니다. 거의라고 한 것은 아주 가끔 "제주도가 더 크지 않나?"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 친구 중에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본인의 관심 영역이 아니면 굳이 알려거나 기억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친구에겐 이런 질문을 던진 제가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전 홋카이도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이번엔 제주도가 아닌 "우리나라랑 비교할 때 누가 더 클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남쪽 남한만을 한정합니다. 그러면 또 일순 긴장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다 누가 "당연히 우리나라가 더 크지"라고 대답을 하면 모두가 동의하는 표정을 짓거나 동의하는 말을 얹습니다. 맞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가 더 크지요. 그런데 이어서 홋카이도가 우리나라 면적의 5/6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섬이라고 하면 이때는 거의 모두가 놀랍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 놓고 놀라는 것입니다. 남한 면적이 10만 412㎢인데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 섬 중 하나인 홋카이도는 8만 3,453㎢이기에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큰 섬이 홋카이도입니다.

홋카이도에 대해 귀를 쫑긋하는가 싶을 때 저의 질문성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홋카이도는 우리가 한자로 표기된 한글로는 북해도(北海道)라고도 부릅니다. 이때 그 도는 보시듯 섬을 이야기하는 도(島)가 아닙니다. 북쪽 바다에 떠있는 섬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홋카이도가 생각보다 커도 섬이라는 사실은 맞지요. 그보다 더 큰 혼슈도 섬이고 크게 보면 아메리카나 유라시아 대륙조차도 대양 위에 떠있는 커다란 섬이니 말입니다. 길이 나있으면 사람이 살아서인가 예로부터 한자권 국가에선 기본 행정구역으로 도(道)를 사용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남북한 8도도 한자로는 마찬가지로 이 도(道)를 쓰지요. 8도에 해당되지 않았던 제주도는 섬으로서는 제주도(濟州島)이지만 행정구역명으로 부를 때에는 홋카이도처럼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가 됩니다.

수상한 점이 많은 홋카이도 지도

이렇듯 홋카이도는 일본의 기본 행정구역 체계인 도도부현(都道府県)의 두 번째 1도(道)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 1도(都)는 우리나라 서울특별시에 해당되는 도쿄도이며 2부(府)는 우리나라 광역시 격인 오사카부와 교토부입니다. 그리고 현(県)은 우리의 시군을 합친 형태로 일본엔 43개의 현이 있습니다. 국토가 우리나라 남한보다 3.8배 가까이 넓은 나라(377,974㎢)이니 현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홋카이도와는 달리 도쿄, 오사카, 교토 등의 도부나 아오모리, 야마구치, 오키나와 등의 현을 부를 땐 이렇듯 거의 뒤의 행정 단위를 넣지 않고 부릅니다. 같은 원칙이라면 홋카이도 또는 북해도도 홋카이 또는 북해 이렇게 불러야 하는데 말입니다.  

홋카이도에 수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니, 이미 그 수상한 점은 나와버렸네요. 1도 1도 2부 43현, 도도부현의 행정구역 체계에서 보듯이 홋카이도는 이렇게 다르게 취급을 받습니다. 일본은 크게 혼슈우,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등의 커다란 4개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인데 다른 섬들과는 달리 홋카이도만이 이 도도부현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대신 그 섬들이 그 안에 43개나 가지고 있는 많은 현을 홋카이도는 단 1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보시듯 홋카이도 전체가 그 현에 상응하는 1도라는 행정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4개의 열도 중 혼슈 다음으로 큰 섬임에도 그 안엔 현이 한 개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행정구역 체계라는 것은 같은 원칙으로 전국 어디든 일사불란해야 하는데 이렇듯 홋카이도만을 예외 취급인지, 특별 취급을 하고 있는 일본입니다. 참으로 수상하고 재미도 있는 홋카이도입니다. 만약 홋카이도 안에 현이 있다면 홋카이도는 도도부현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역사상 한때 홋카이도에 3개의 현을 설치한 적도 있다 하니 그렇다면 당시 일본의 기본 행정구역은 도도부현이 아니라 두 번째 도(道)가 빠진 도부현(都府県)이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 정책이 이어졌다면 오늘날 43현이 46현이 되었겠지요.

왜 홋카이도는 이렇듯 같은 일본임에도 혼자만 다르게 가고 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행정의 편의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 안에 현을 설치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단일한 행정구역 체계로 놓는 것이 유리하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판단의 배경에는 홋카이도 전체 인구가 520만 명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인구도 적은 것은 아닌데 일본 전체 인구가 1억 2천5백만 명에 달하니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넓은 땅에 적은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데 그것을 잘게 썰어서 다스리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미국의 연방에 속한 50개 주(州)들이 인구수로 나누어서 분할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 나라의 중서부엔 홋카이도보다 넓은 땅에 적은 인구의 주들이 즐비합니다. 그보다는 일본 형성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 더 타당한 이유일 것입니다.

오르골과 유리 공예로 유명한 오타루의 명소 운하

일본 역사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는 영웅호걸이 출현하며 전 열도를 전쟁의 쑥대밭으로 만들며 통일을 이루어 낸 16세기 전국시대일 것입니다. 이 시기까지 일본의 역사에 홋카이도는 없었습니다. 전쟁의 말발굽이 그 땅을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 땅엔 일본인이 살지 않았고 아이누족이라 불리는 원주민이 살았습니다. 홋카이도란 명칭도 없었고 그곳은 에조치라 불렸습니다. 전쟁과 통일은 땅따먹기인데 본토의 일본인이 그 넓은 땅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그곳을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벼농사 수확량을 중시하는 그들 눈에 에조치는 춥고 척박해 농경이 불가능한 땅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만약 고려나 조선 초기에 우리 선조가 홋카이도를 침공해 아이누족을 누르고 정착하였다면 그곳은 아마도 우리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 땅은 일본인이나 뒤에 등장할 러시아인에게 무관심의 지역이었습니다. 일본 통일 후 에도에 막부를 연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 시대에도 홋카이도는 그곳이 일본 영토임을 확인하는 수준에서만 소극적으로 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어디를 가도 그 지역 맹주인 다이묘가 살았던 근사한 성이 있는데 반하여 홋카이도엔 그 흔한 성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 역사의 두 번째 변곡점에서 홋카이도는 비로소 일본의 관심 영역에 들어오게 됩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유신 전인 1854년 미국에 굴복한 미일화친조약으로 홋카이도의 남부 하코다테 항을 개항한 막부였습니다. 이제 일본은 유신을 통해 서구 열강들과 맞짱을 뜨는 근대화된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그 근대화 중의 하나에 행정구역 체계 개편도 당연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1871년 유신의 주도 세력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폐번치현(廢藩置県)을 통해 막부의 쇼군 휘하 영주인 다이묘들이 다스렸던 번들을 폐지하고 오늘날과 같은 현으로 바꾸는 일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쇼군 밑에 있던 지방 권력을 폐하고 중앙에서 내려 보낸 공무원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때 에조치도 홋카이도라는 이름으로 중앙 정부의 행정 체계에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됩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처럼 본토의 많은 일본인들이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해 오늘날과 같은 홋카이도가 된 것입니다. 일본의 북부 개척시대였습니다. 그런 이주 때엔 우리가 역사에서 수차례 목도했듯이 기존 원주민들의 희생이 필연적입니다. 대대로 그 땅에 살던 아이누족은 미국의 인디언처럼 그렇게 희생되고 일본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홋카이도 본격 진출(?)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로 그 섬을 호시탐탐 노리기에 그것을 방어하는 성격도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홋카이도의 주가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일본이 우리와의 독도 분쟁처럼 러시아와의 쿠릴열도 영토분쟁에서 보듯 당시 극동으로 진출하는 러시아는 남하하며 홋카이도를 탐냈습니다. 결과는 이후 러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서 서로 1승씩을 주고받으며 오늘날과 같이 정리되었습니다.

풍부한 수자원으로 변용되는 다설 지역 홋카이도의 설경 (출처, pixabay)

역사의 어느 시점까지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던 쓸모없던 땅이었던 홋카이도는 이제 일본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에 박혀있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임산자원 등을 비롯한 축산물과 해산물, 그리고 이국적인 청정한 자연으로 인해 남쪽의 내국인과 바다 밖 외국인을 끌어모으는 관광산업으로 일본의 현재는 물론 미래를 먹여 살릴 땅이 된 것입니다. 특히 축산업의 경우는 일본에 있는 소의 45%가 홋카이도에서 사육될 정도로 낙농산업은 독보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사람은 일본 전체 인구의 4%가 사는데 그들이 먹는 소는 거의 절반이 그곳에 사는 것입니다. 홋카이도 어디를 가든 유가공품인 우유와 아이스크림이 눈에 띄는 이유입니다. 물론 맛도 좋습니다.

홋카이도가 일본의 미래를 먹여 살릴 땅이라는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일본은 홋카이도에 현을 설치하지 않고 단일 행정구역으로 남겨 놓은 이유가 미래를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홋카이도는 70%가 삼림지로 그 안에는 6개의 국립공원이 있어 산과 호수, 연안 바다 등이 미개발 상태로 천연의 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520만 명의 인구는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쪽 끝 삿포로 주변에 쏠려서 살고 있어 그 동쪽 넓은 지역은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넓은 땅에 풍부한 자원, 그리고 적은 인구는 홋카이도의 자급자족률을 높여주고 있어 언제라도 추가 인구를 받을 충분한 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개발을 못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의 개발을 위해 그냥 놔두고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어느 날엔가는 지금 세대의 후손들이 개발된 홋카이도의 중앙 지역과 동쪽으로 가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홋카이도는 도(道)를 해지하고 몇 개의 현(県)으로 나뉘겠지요.

지난 7월 마지막 주말을 껴서 홋카이도로 가족 휴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본은 현재 코로나로 인해 판매하는 여행사 상품에서 단체여행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관리의 문제가 있어서 그렇겠지요. 4일 여행인데 코로나 PCR 검사만 세 번을 받았습니다. 출국 전, 입국 전, 입국 후 이렇게 말입니다. 이런 시기라 일본 도착 후 올라 탄 관광버스에서 들은 가이드의 일성이 더욱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여행을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당수의 가이드는 휴업을 못 버티고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못 버틴 사람은 가이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다른 여행객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H투어가 전세기를 띄워 추진한 여행이었는데 비행기에 탑승해보니 한 자리도 빈자리가 없는 만석이었습니다. 여행비 상승에 코로나 검사까지 더해 이전보다 만만치 않은 비용과 번거로운 절차임에도 이 상품이 완판이 된 것입니다. 전세기를 띄울 정도로 말입니다. 그간 못 갔던 여행자들의 여행에 대한 욕구가 비용과 절차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겠지요. 어서 코로나가 말끔히 사라져 이렇게 특별하게 보이는 일들이 일상적인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바둑판형 계획도시인 삿포로의 과거(왼쪽 사진)와 현재 (TV타워 90m 전망대 조망)

11년 전 홋카이도에 갔을 때에는 서두에 논했듯이 홋카이도가 그렇게 큰 섬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이번에는요.. 삿포로가 그렇게 큰 도시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우린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도시들은 올초 열렸던 중국의 베이징처럼 큰 도시들도 물론 있지만 대개는 새하얀 눈이 있어서인가 눈꽃 속의 동화나라처럼 작고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샤모니, 생모리츠, 인스브루크, 알베르빌 등 만년설이 있는 알프스에 위치한 개최지들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곤 합니다. 1972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삿포로도 세계적인 눈축제까지 매해 열려서인가 역시 또 그렇게 생각되는 면이 제겐 있었습니다. 물론 프로야구단과 프로축구단까지 보유한 큰 도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 예상보다 큰 도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많은 인구수도 그렇지만 삿포로의 명물인 시내 TV타워에 올라가서 본 사방 넓은 도시 크기에 더 놀랐습니다.

이제 친구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전 이번에 습득한 홋카이도에 대한 문제를 더 이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삿포로가 우리나라 대구보다 클까? 작을까?" 이어서 짜증 섞인 친구의 원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고마해라. 마이 묵으따.."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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