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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불후의 산울림

by 뉴스버스1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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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광용 에세이스트 

 

2005년 태어난 유튜브는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 영상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그 전엔 영상이라 함은 주로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TV를 연상했는데 '너의 TV'를 뜻하는 유튜브가 공급하는 다양한 영상들은 거의 1세기를 지배해온 전통적인 TV의 영상 세계를 후딱 추월하고 초월도 하였습니다. 일단 그 어떤 방송국도 61개의 언어(2022. 8 현재)로 전 세계에 송출하는 곳은 없으니까요. 가히 영상의 홍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맨 앞에 유튜브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를 소유한 구글은 시대의 변화로 사라질지 몰라도 유튜브는 소멸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 이런 유튜브가 주는 많은 효용들 중에 과거 위대한 음악가들의 연주를 직접 눈으로 보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큰 즐거움으로 꼽고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음악을 들으려면 프라이빗한 카세트테이프나 LP, 그리고 이후에 나온 CD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시대가 길게 있었습니다. 수동적으로는 퍼블릭한 라디오가 그 역할을 훨씬 더 길게 음악으로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라디오 음악 방송의 인기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었습니다. 물론 광고 단가도 높았지요. 그것들은 당연히 볼 수는 없는 음악이었습니다. 음악을 보려면 TV를 통해서, 또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음악가의 연주 공연을 가야만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대중음악이든 고전음악이든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유튜브가 등장하며 우리는 과거 듣기만 했던 그들 음악가의 공연과 연주 모습을 실감 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마음껏 무료로 말입니다. 우리 시대 숱하게 듣기만 했던 'Stairway to Heaven(스테어웨이 투 헤븐)'을 부른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 실제 공연 모습을 유튜브로 처음 보았을 때의 즐거운 충격이란! 1987년 폐간된 <월간 팝송>의 한쪽 화보로나 보던 조각 미남 로버트 플랜트가 젊은 시절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모습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지미 페이지의 화려하고 현란한 연주 모습도 우린 그렇게 유튜브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8년에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도 그렇게 보고 싶은 우리의 정서가 반응했을 것입니다. 유난히도 퀸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듣기만 해온 그 밴드의 음악과 리드 싱어 프레드 머큐리의 삶을 연기자를 통해서나마 직접 볼 수 있기에 그 영화는 대박을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2019년 개봉한 엘튼 존의 일대기를 보여준 <로켓맨>이나 최근인 지난 7월 개봉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대기를 보여준 영화 <엘비스>는 그렇게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선 퀸의 프레디 머큐리만큼 인기나 관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적인 재미가 덜해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영화 <엘비스>의 경우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활동 시기가 그가 사망한 1977년 이전이기에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우리나라의 팬들이 적어서도 흥행이 저조했을 것입니다. 그가 로큰롤의 왕인 것은 알지만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겐 음악도 음악이거니와 1950~60년대 미국 남부의 정경과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로큰롤이라 불리는 몹쓸 음악을 들고 나와 날뛰는 야생마와 같은 엘비스를 저지하려는 기존 문화 보수층의 사회 이슈들까지 등장해 나름 볼 것이 많은 영화였습니다.  

대중음악도 그렇지만 유튜브를 통해 본 클래식계의 거장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과 그들의 베를린 필이나 뉴욕 필의 음악을 처음 보았을 때도 저는 즐거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접 공연장에 가서 본 것이 아님에도 간접적이나마 백문불여일견(百問不如一見)임을 실감하게 하는 경험을 문명의 이기인 유튜브를 통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전 그간 음악 관련 서적에서나 보아온 아티스트들을 차례로 찾아서 유튜브를 통해 보곤 합니다. 지난 6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우승자인 임윤찬의 결선 연주는 실시간 생방송으로 유튜브를 통해서 중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파를 탔던 방송이 이젠 인터넷을 타고 국경을 제한 없이 마구 넘어가는 것입니다. 과연 인류의 음악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유튜브입니다.

이렇듯 우린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그간 보기 힘들거나 볼 수 없던 음악계 거장들의 연주 모습을 언제라도 꺼내서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성기 때 연주 모습이 유튜브에 고스란히 올라와있으니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그 사람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이제 죽어서 유튜브도 남기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번 주 저는 유튜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거장의 모습을 공중파 TV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흔한 기회는 아닐 것입니다. 정확히는 공중파 TV를 '다시 보기'한 케이블 TV를 통해서였습니다. 그가 8월 초 TV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그의 한 팬 하는 제가 유료 '다시 보기'로 그의 공연 모습을 찾아서 본 것입니다.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KBS TV의 <불후의 명곡>이고 제가 보고파한 그는 바로 김창완 아티스트였습니다. 코로나가 이완된 올해 여름 특집 방송으로 강릉 바닷가 옆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에 그가 후배 밴드들과 함께 출연한 것입니다. 지금은 김창완밴드로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산울림이란 밴드명도 따라다니고 있는 그입니다.

언제나 청춘, 김창완 아티스트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연주 모습 / 2022, 7, 18

어느 날 갑자기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산울림의 <아니 벌써>란 노래는 어린 저의 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아니, 우리나라 가요에 이런 노래가?" 하고 놀란 것입니다. 당시 대중가요는 트로트와 트로트 필이 들어간 발라드, 그리고 젊은 층에서의 포크가 주종을 이루던 시절이었는데 갑자기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노래가 툭 하고 제 귀를 울린 것입니다. 그런데 요상한 그것이 좋았습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는 <아니 벌써> 이 노래를 가요계의 혁명곡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혁명이라 함은 어떤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 그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분리할 만큼 진보성 있게 영향력을 끼친 것을 가리키는데 <아니 벌써>가 우리나라 가요계를 그렇게 만든 노래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변함없는 사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가 일전에 공개적으로 쓴 <우리들의 죽은 만화 영웅들>이란 글에서도 만화에서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 영화에서 강제규 감독의 <쉬리>와 함께 가요에서는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각각의 예술과 문화 마당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작품들로 언급했었으니까요.

1977년에 데뷔한 산울림은 실체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리드 싱어인 김창완 아티스트가 산울림 활동 시 발표한 곡들을 그의 밴드에서 지금도 연주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데뷔 시 산울림으로 함께 시작했던 친동생인 두 분이 특별한 이유로 함께 활동하지 못하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산울림의 데뷔 곡 <아니 벌써>가 세상에 나온 1977년 같은 해, 대학 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나온 역대 대학 가요제 곡들 중 최고로 꼽히는 대상 곡인 <나 어떡해>도 산울림 형제의 둘째인 김창훈 아티스트가 만든 곡이었습니다. 과연 대단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입니다. 데뷔 첫 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화제의 노래 두 곡을 형제가 각각 다른 밴드에서 발표했으니까요.

그것을 시작으로 산울림은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일일이 세기에도 벅찬 주옥같은 명곡들을 계속해서 쏟아냈습니다. 큰 산이 울려도 생쥐 한 마리만 나오기도 해 이를 태산명동서일필(太山鳴動鼠一匹)이라 부르는데 산울림은 그 울림으로 가히 집채만한 코끼리를 나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3형제 3인조 밴드였던 산울림은 2008년, 31년 간의 활동을 안타깝게도 마감했습니다. 여러모로 역시 3형제 3인조 밴드로 활동했던 호주 출신 월드 팝스타 비지스를 떠오르게 하는 우리의 산울림입니다.

대한민국 가요사의 혁명곡인 '아니 벌써'가 실린 산울림 1집 / 1977

이번 <불후의 명곡> TV 공연에서 보았듯이 김창완 아티스트는 대단했습니다. 일단 그의 보컬을 듣고, 그의 모습을 보고 누가 그의 나이를 예상할 수 있을까요? 45년을 활동해온 것만으로도 예상 가능한 그의 연배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청춘과 같은 그의 룩과 연주 시 하이 포지션으로 카랑카랑하게 외쳐대는 그의 샤우팅은 그날 함께 출연했던 후배 록 밴드의 싱어들에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목과 몸에 좋은 이슬만 드시고 살았나 봅니다. 불후(不朽)는 썩지 않고 살아있다는 뜻인데 그런 면에서 그는 그 프로그램에 참으로 부합하는 출연자였습니다. 실제 그의 나이는 이제는 늙어서 유튜브에서나 볼 수 있는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나, <불후의 명곡>에 연주자로 출연한 김창완 아티스트와는 달리 패널로 출연했던 스모키의 리드 싱어 크리스 노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미소년이었던 그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많이도 제대로 변해있는데 김창완 아티스트는 가던 시간을 세우고 청춘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듯합니다.   

TV로 본 강릉 록 페스티벌 현장의 모습은 가히 열광적이었습니다. 몹쓸 음악이었던 로큰롤에서 온 록이라는 음악이 주는 에너지도 그렇지만 그간 팬들이 코로나로 인해 속에 눌려져 있던 것들을 이런 대규모 오픈 공연을 통해 밖으로 화산처럼 분출해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날 참석했던 어린 친구들은 세대 차이로 인해 김창완 아티스트를 가수보다는 연기자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TV에선 음악 프로보다는 연기자로 간간히 모습을 비추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매일 아침을 아름답게 여는 라디오 DJ로도 그는 무려 27년 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네요. 참으로 다양하게 열심히 사는 그입니다. 농자(農者)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는데 농사를 지어도 왠지 그것도 훌륭히 잘 해낼 것만 같은 그입니다. 진정한 르네상스인!  

강릉 록 페스티벌이 열린 경포호수공원의 아름다운 모습

김창완밴드는 그날 프로그램 2부에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아니 벌써>, <나 어떡해> 등 이 세 곡을 메들리로 불렀습니다. 언제 들어도, 또 들어도 유행에 뒤지지 않는 고전과 같은 그들의 대표곡들입니다. 특히 그가 직접 기타로 연주한 전주가 3분을 넘어가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오리지널 영상으로 보며 들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공중파에서 다시 산울림의 곡들을 이렇게 이어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날이 또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찾아보니 김창완밴드는 올해 들어 전국을 순회하며 활발히 공연도 하고 있네요. 이젠 못 가본 그의 공연도 한 번 가보렵니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청춘 에너지를 받으러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유튜브엔 그의 곡들이 넘쳐나지만 이번에도 확인했듯이 그것으로만 보기엔 너무 이른 그의 청춘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디 이미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유튜브엔 오래오래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천천히 안주하길 기원합니다.

록 페스티벌 파이널 무대에선 그날 출연했던 모든 밴드들이 나와 김창완 아티스트를 둘러싸고 그와 산울림을 오마주 하듯 <개구쟁이>를 합창했습니다. 언젠간 가겠지라며 다소 절망적으로 노래하기도 한 그이지만 그의 푸르른 청춘은 이렇듯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개구쟁이!

언제나 청춘 2, 김창완 아티스트의 '개구쟁이' 연주 모습 / 2022, 7, 18

* 글쓰기를 마치고 삘(feel)이 오를 대로 오른 저는 안산에서 열리는 8월 김창완밴드 공연을 가려고 급 티켓팅을 추진했으나 역시나 일찌감치 마감으로 굳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수시로 그곳을 들락거린 결과 극적으로 티켓팅에 성공하였습니다. 누군가 취소한 티켓.. 브라보!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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