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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착한 패트론 만난 하이든 vs 독립 전업음악가 모차르트

by 뉴스버스1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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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2- '파파 하이든 & 신동 모차르트' (2)

음악의 역사에서 왕이나 대주교의 궁정에 속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하여 음악을 한 최초의 프로 음악가가 누구냐 하는 논쟁은 상당히 재미있는 주제에 속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로 교황의 작곡 의뢰조차도 바쁘다는 핑계로 튕기다가 평소의 두배가 넘는 작곡 비용을 받아낸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 Prez)를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흥행사(Impressario) 측면이 더 강했던 헨델을 드는 사람도 있다. 오페라 작곡의 상연권(저작권)만으로도 큰 부자가 된 로시니(Joachino Rossini), 제대로 시도되었다는 측면과 이루어냈다는 측면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빼놓을 수 없다. 낭만파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음악가들은 작곡이든 연주든 음악만으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시도가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착하고 음악 좋아하는 군주를 만난 하이든

숙식과 직장이 해결되던 성 슈테판 음악학교에서 변성기 때문에 18살에 쫓겨난 하이든은 이탈리아 작곡가 포르포라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제대로 된 작곡의 세계를 처음 접했다. 작곡법에 목말랐던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왕성한 학습력을 보였고, 이후 10년간은 생계는 고달팠지만 음악가로서 차츰 이름을 알리는 시기였다.

그의 첫 성공은 오페라 <절뚝발이 악마(Der krumme Teufel)>가 1753년 상연되면서였다. 예명이 베르나르돈(Bernardon)으로 알려진 희극배우 폰 쿠르츠(oseph Felix von Kurz)의 의뢰로 만든 작품이었다. '약간 위험한 내용'이라는 검열에 걸려 공연은 곧 내려졌지만, 출판권을 팔 수 있었다. 이듬해부터 3년간 하이든은 빈의 사교계에서 프리랜서 음악가로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며 제국교회에서 성악가로도 활동했다. 그러자 후원자도 나타났다. 툰(Thun) 백작부인이 그를 피아노와 성악교사로 초빙했고, 퓌른베르크 남작(Baron Carl Josef Fürnberg)의 성에 초대되어 첫 현악4중주를 작곡했다. 그의 우아하고도 유머러스한 작법이 알려지는 반전의 계기였다. 퓌른베르크 남작의 추천으로 1757년 모르친 백작(Count Morzin)은 하이든을 연봉 200 플로린의 궁정악장으로 채용했다. 하이든은 여기서 초기 교향곡들을 작곡했고 결혼도 한다. 

에스테르하지 궁전 내부의 하이든홀.

모르친 백작은 3년만에 재정적 어려움이 생겨 궁정악단을 해체하지만 하이든은 1761년 재빨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폴 안톤(Paul Anton) 후작으로부터 궁정악단 부악장의 자리를 얻는다. 지금의 헝가리에 위치한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는 엄청나게 넓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여 당시로서는 손꼽히는 궁정악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악장 베르너(Gregor Werner)는 연로하여 사실상 궁정교회만을 돌보고 있었는데, 1766년 사망한다. 이전부터 사실상의 궁정악장 역할을 하던 하이든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의 에스테르하지 성과 새로 지어진 헝가리 깊숙한 시골의 에스테르하자(Esterháza) 궁까지 주군 가족을 따르며 작곡과 오케스트라 지휘, 교회 음악, 실내악 연주 참가 등 쉴 틈 없는 시간을 보냈다. 파울 안톤 공은 본인이 직접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잡고 현악 4중주 등 실내악 연주에 참가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 뒤를 이은 니콜라우스 대공(Prince Nikolaus)은 음악을 너무 사랑하여 거의 매일 하이든을 찾았다. 이 기간 하이든은 비올족의 일종인 현악기 바리톤 연주자였던 니콜라우스를 위해 126개의 바리톤 아리아를 포함하여 엄청난 작품을 쏟아냈다. 니콜라우스는 오페라 제작에까지 열의를 보여 저택 안에 오페라극장을 만들었고, 하이든은 오페라 작곡과 제작까지 맡아서 해야 했다. 게다가 일생 총 106개나 되는 교향곡을 작곡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상대적으로 성공한 오페라는 없다시피 했다. 혹사를 당하며 휴가조차 가지 못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고별 교향곡’을 만들어 주군에게 음악적으로 호소한 일화는 그렇게 나온 것이다.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

이곳에 있는 동안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이 의뢰하는 음악은 무엇이든지 작곡해야만 했으며 그의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1779년 니콜라우스 대공은 하이든에게 작품의 외부출판과 그에 따른 수입을 허가해준다. 이로써 그는 몸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묶여있지만 유럽 음악계 전체를 이끄는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외부의 작곡의뢰도 받아들여 파리 교향곡들(1785–1786)과 스페인 카디즈(Cádiz)로부터 의뢰받은 <십자가상 일곱 말씀(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도 만든다. 어쩌다 주어지는 빈 방문의 기회에 그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다른 음악가들과의 짧은 교유를 누리기도 한다.  

179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육군 대장 출신인 니콜라우스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가문의 후계자는 다행스럽게도 음악에 별 관심이 없어서 하이든은 명예롭게 퇴직하고 꿈에 그리던 자유를 얻게 된다. 이후 하이든은 그동안 축적했던 부와 명성을 즐기며 영국 등지를 여행하는데, 1791~1795년 두 번에 걸친 영국여행에서 흥행사 잘로몬의 요청에 의해 교향곡을 12개나 작곡한다.

궁정하인에서 음악가로 독립선언한 모차르트

이탈리아에서 구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느덧 17살이 된 모차르트는 신동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고향인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본격 직업 음악가의 길에 나선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에게 여기저기서 작품 의뢰가 들어오면서 활발한 작곡활동이 가능했다. 이 시기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등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이미 글로벌 클래스인 모차르트에게 너무 좁은 동네였다. 모차르트는 밀라노에서처럼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하길 원했으나 불가능했다. 운영비용 문제로 궁정 극장은 1775년 문을 닫아버렸으며, 다른 극장은 너무 부실했다. 그런 탓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스키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이나 <양치기 왕(Il re pastore, K.208)> 같은 소규모의 오페라밖에 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잘츠부르크 궁전에서 한두번 연주되고 말았다.

잘츠부르크 대성당 내부.

그러나 모차르트에게는 이런 사안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음악을 이해하고 무난한 성품을 지닌 폰 슈라텐바흐가 1771년 사망한 것이다.

이듬해 잘츠부르크 영주로 새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대주교(Archbishop Hieronymus von Colloredo)는 전임 영주와 달리 상당히 깐깐하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카톨릭 성직자였지만 기존 카톨릭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 대신 개신교의 검소함과 경건함을 좋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건축이나 미술, 음악 등에 나가는 비용을 피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도 헐값 연봉 150 플로린을 주며 천재의 재능을 거의 무시했다. 그러니 이미 자신감에 차있던 모차르트는 그런 대주교를 충심으로 섬기지 않았고, 충돌까지 불사했다.

잘츠부르크 생활에 지친 모차르트는 본업을 사보타지하고 다른 곳에 구직하려고 아버지와 함께 1774년 10월 뮌헨을 방문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뮌헨의 막시밀리안 선제후가 카니발 기간에 상연할 오페라 부파를 의뢰해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가 작곡되었다. 1775년 1월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해당 극장 상연작들이 밀려있는 바람에 3회에 끝나버렸고, 결국 뮌헨에 직장을 구하려는 시도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포기할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1777년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하고, 모친과 함께 다시 뮌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대주교에 대한 불복종을 알고 있던 선제후는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라'는 등의 뜬금없는 조언만 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모차르트 모자는 유서 깊은 교향악단이 있는 만하임(Manheim)으로 갔으나, 카를 테어도어(Karl Theodor) 선제후에게 원하던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경제적 이유로 차이고 만다. 모차르트 모자는 후원자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이 있는 파리로 갔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고 귀족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및 작곡 알바로 체류비를 만들어가며 반년동안 노력했으나 구직은 안되고 동행했던 그의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모차르트는 실망만 안고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구직은 못하고 아내만 잃자 아들에게 귀향을 재촉한다. 그는 지역 귀족들을 발이 닳도록 찾아 450 플로린의 연봉을 보장받았고, 대주교로부터는 타지로부터 초청을 받으면 출장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모차르트는 귀향 을 내켜하지 않아 이곳 저곳을 들르면서 시간을 끌다가 별수없이 잘츠부르크로 복귀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한없이 답답한 곳이었다.

오페라가 자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한 모차르트는 순회공연단을 위해 오페라 부파였던 <가짜 여정원사>를 독일어 징슈필로 개작하였다. 1779년에는 모처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징슈필 오페라인 <차이데(Zaide)>를 의뢰받아 작곡했으나 대본에 문제가 많은데다 징슈필 치고는 오페라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탓에 도중에 포기했다. 1780년 뮌헨의 테오도르 선제후가 궁정 카니발 용으로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를 의뢰해 이듬해 1월 성공적인 초연을 치른다.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제국 제위를 계승한 요제프 2세(Joseph II)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고향 연봉의 절반이 넘는 보수로 황제 앞에서 연주하는 제안을 받는데, 대주교가 이를 불허해버린다. 자신을 하인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폰 콜로레도 대주교가 원수처럼 느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기 싫었다. 십자기사단 성에 머물다 베버 자매의 집으로 하숙집을 옮긴 이후 대주교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대주교는 아버지 허락부터 받으라며 사표수리를 거부한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아버지에 대한 도리는 알아서 할 테니 고상한 척 하지 말라고 대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주교는 자신의 비서에게 '싸가지 없는 음악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해서 내쫓아 버린다.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대주교,

왕궁이나 지방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는데 신물이 난 모차르트는 과감하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한다. 혈기 넘치는 25세의 청년은 지체 없이 빈으로 떠났으나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대주교의 빈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별채에 머무르던 중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모차르트는 숙소를 옮겼다.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제프 랑에(Joseph Lange)와 결혼한 상태라서,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 베버를 만나 사귀었고, 결혼에 이른다.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명성이 자자하던 피아니스트 무치오 클레멘티(Mucio Clementi)와의 경연에서 승리해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는다. 27개나 되는 최다 피아노협주곡 작곡가의 경력은 이렇게 시작되며 자신이 직접 연주한 공연은 성황을 이루었다.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 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해 미리 티켓을 파는 예약연주회를 열었다. 오늘날 정기연주회로 번역되는 서브스크립션 콘서트(subscription concert)는 원래 예약연주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차르트가 정립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황제 요세프 2세가 주문한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의 작곡을 맡은 모차르트는 징슈필 오페라 <후궁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로 인정을 받는다. 빈에는 그의 팬 겸 후원자도 생겨나는데, 판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백작은 외교관으로서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가 모차르트에게 공부의 기회까지 제공했다.

1784년 처음 대면한 24살 연상의 파파 하이든 역시 만나자마자 그의 재능에 감탄하며 후원자로 자처한다. 같은 해 12월에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Free Mason)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빈 정착생활과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기서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들도 작곡하였다.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는 특히 프리메이슨 사상에 기초한 작품이다. 

모차르트가 전업 작곡가로서의 독립에 성공했다는 것은 예술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전업 작곡가 이전의 음악가들은 귀족이나 대주교의 궁정에서 서열이 시종장, 요리사, 재단사, 이발사, 마필관리사 등에게도 밀리는 하인 취급을 받았다. 당대의 계몽주의와 경제적 발전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시점에서 모차르트의 성공은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전례가 없었다면, 베토벤의 활동이나 이후의 리스트, 쇼팽, 베를리오즈, 브람스의 낭만파 음악, 다시 현대음악의 시작인 쇤베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역사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의 독립은 자신에게도 상당히 현명한 선택이 되었고, 독립 전업 음악가의 시조이며, 최초의 성공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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