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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하이든 vs 3자매와 사랑한 모차르트

by 뉴스버스1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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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평론가 

 

프레너미 시리즈2- '파파 하이든 & 신동 모차르트' (3)

변성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립의 길로 내몰렸던 성악애호자 하이든은 10년의 무명 시절 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이후엔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단을 거쳐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귀족이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30년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안톤 파울과 니콜라우스 두 후작의 지극한 음악사랑으로 인해 하이든은 돈 쓸 시간이 없었다. 덕분에 하이든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말년엔 런던에서 뜨거운 인기까지 얻어 유복한 생활을 했다.

반면 고전시대의 쌍두마차인 모차르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려서부터 유럽 곳곳을 방문한 연주여행을 통해 신동연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하이든과는 달리 틈만 나면 고약한 군주 폰 콜로레도 대주교에게서 뗘나려고 시도했다. 하이든과 비슷한 27살의 나이에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다. 예약연주회 문화를 정착시키며 역사상 첫 전업작곡가로 성공한 모차르트의 수입은 당시 음악가들의 평균보다 10배 가량이었다. 부부 둘 다 낭비벽이 심했고, 도박과 유흥과 사치에 빠진 탓에 늘 돈에 쪼들리긴 했지만, 베토벤을 비롯한 후대 음악가들에게 음악만으로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유명세와 명예도 누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지루한 결혼 생활을 했던 하이든    

구텐브룬이 그린 요제프 하이든의 초상화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 가문 궁정악장 시절 결혼을 했다.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 1729–1800)라는 3년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하이든은 사실 아내보다는 처제 테레제(Therese 1733년생)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했던 알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한 모차르트와 비슷하면서 다른 궤적이다. 게다가 마리아 안나는 음악에 무관심했고, 결정적으로 불임이어서 부부간의 애정은 애처 싹을 틔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이든은 거의 음악에만 매달렸고, 일생 무려 106개나 되는 교향곡을 쓸 수 있었다. 2위 그룹과 두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의 교향곡 생산이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모든 출장을 따라다녔고, 그 바람에 아내와도 자연히 멀어졌다. 처제 테레제와 스캔들이 났을 법도 하지만, 구설로 인한 실직보다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하이든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자제력이 발휘됐다.

결국 부부는 각각의 애인을 찾게 되었다. 마리아 안나의 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1770년에 만난 화가 구텐브룬(Ludwig Guttenbrunn)이다. 남편 하이든의 초상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하이든은 이탈리아 출신 소프라노 가수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와 1779년부터 상당히 긴 기간을 아주 가깝게 지냈다. 폴첼리가 낳았던 아들 안토니오(Antonio)는 최근 하이든 연구가들에 의하면 둘 사이의 혼외자로 간주되고 있다.

하이든에게는 플라토닉 러브의 상대도 있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빈 주재 주치의였던 폰 겐칭어(von Genzinger) 박사의 아내 마리아 안나(Maria Anna von Genzinger 1754–1793)였다. 하이든보다 22살 연하로 지적이고 음악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던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든은 헝가리 시골 먼 곳에 위치한 에스테르하자 별궁에서의 외로움을 호소하는 한편 그녀와 만나는 행복감을 누릴 빈 방문을 애타게 기다린다고 쓰곤 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은퇴하고 런던으로 건너간 후에도 하이든은 그녀에게 자주 편지를 했다. 그런 관계로 지낸지 4년 만인 1793년 그녀의 죽음은 하이든에게 충격을 줬고, 하이든은 피아노 변주곡 f단조(Hob. XVII:6)를 써서 애도를 표현했다. 

1795년 하이든은 빈으로 귀환하여 존경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린다. 법적인 아내 마리아 안나는 1800년 사망했고, 하이든은 그녀를 애도하는 어떤 곡도 쓰지 않았다. 파파 하이든의 대는 이로써 끊겼다.  

베버가문 세 자매와 사랑한 모차르트

알로이지아의 남편 요제프 랑에가 그린 모차르트의 초상화

잘츠부르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1777년 모친과 함께 뮌헨의 막시밀리안 선제후를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낙담한 모차르트 모자는 만하임에 갔으나 거기서도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에게서 자리를 얻지 못했다. 대신 21살의 볼프강은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그녀의 음악선생이 된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고, 바로 청혼까지 했다. 당시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2곡(K. 294, K. 316)을 작곡했다. 두곡 모두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요하는 작품이다. 특히 '테실리아의 백성들이어!(Popoli di Tessaglia!, K.316)'는 기네스북에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고음을 내야 하는 아리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난곡이다. 

알로이지아의 아버지 프리돌린은 직업외교관이었지만 더블베이스 연주자였으며 악보 카피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이복동생은 <자유의 사수(Der Freischütz)>로 독일 국민주의 음악의 시대를 열었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아버지다.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4자매는 모두 음악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알로이지아의 언니 요제파(Josepha) 역시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고, 셋째 콘스탄체(Constanze)도 나중에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갖고 있었다. 막내 조피(Sophie)도 성악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당시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며 프로모터로 직업을 전환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사임하고 나와 빚을 많이 진 처지인 데다,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도 구직에 실패한 채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바람에 결국엔 소득 없이 잘츠부르크로 귀향해야만 했다. 

알로이지아 랑에의 초상화

잘츠부르크가 싫었던 볼프강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여기저기 들르며 시간을 보내다 뮌헨을 거치는데, 이곳에서 알로이지아와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가난한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화가이자 연극배우였지만 집안에 제법 재산이 있었던 요제프 랑에(Joseph Lange)와 결혼해버린다. 남편이 죽은 후 홀로 네 자매를 길러야 했던 어머니 세실리아의 강요와 자신의 현실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구텐브룬이 하이든의 초상화를 그린 것처럼 랑에도 나중에 동서지간이자 한때 아내의 연인이었던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그린다.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베버 가문도 만하임에서 빈으로 이사왔다. 부친 프리돌린이 일찍 사망해 일정한 수입이 사라졌고, 전업가수로 성공한 요제파와 알로이지아에게 빈은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주교의 빈 저택 별채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태로 머무르던 모차르트는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듣고 숙소를 옮겼다. 당시 알로이지아는 결혼으로 이미 분가해 살고 있었다. 집에는 콘스탄체와 조피가 남아있었는데, 청년 모차르트는 이들과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다 콘스탄체와 연인으로 발전한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라며 둘의 결혼을 반대했고, 예비장모 세실리아도 모차르트를 음악을 핑계로 빈둥대는 백수건달 정도로 봤던 탓에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젊은 청춘을 누가 말리랴. 아들의 간청에 레오폴트는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세실리아는 모차르트가 나름 인기있는 음악가임을 확인한 후 오히려 콘스탄체를 부추겼다. 1782년 8월에 열린 결혼식에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베버 가문 사람들만 참석했다. 

모차르트가 이후에도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면 사랑스러움과 장난기가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3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서 흥분했다오" 등 지금 봐도 농도 짙은 글들이 난무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알로이지아를 대체할 의도로 콘스탄체를 선택한 것이 아님은 모차르트 연구자들 사이에 분명해진 사실이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383, K.416, K.418, K.419, K.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 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의 콘스탄체 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 <돈 죠반니(Don Giovanni)>의 빈 초연 때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고,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 초연에서는 피오르딜리지로 출연했다.

큰 언니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에서 밤의 여왕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의 결혼으로 전문 가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K.427)를 보면 그녀 역시 상당한 실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이 초연될 때 소프라노 독창자는 아직 신혼인 콘스탄체였다. 

막내 조피 역시 제법 괜찮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나 조피는 자신의 음악을 펼치기보다 형부 모차르트를 바라보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벌이가 좋았지만, 돈을 벌면 도박과 사치로 그 이상을 써버렸고, 콘스탄체의 낭비벽은 남편보다 한술 더 떴다. 이 모차르트 부부는 돈이 좀 생기자 빈 중심가의 비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도 고용하고 심지어 승용마도 샀다. 그리고 아들 카를 토마스는 비싼 기숙사립학교로 보냈다. 집에서는 뭉칫돈을 들여 자주 파티를 벌였다. 그가 빈에서 사들였던 피아노는 무려 900 플로린이었는데, 이는 잘츠부르크 시절의 연봉 2년치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그는 사치와 도박을 절제해 빚을 해결하는 대신 작곡과 연주활동을 늘려서 메우려고 했다. 이로 인한 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는 모차르트의 사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언니 부부가 돈이 없어 하녀를 쓰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모차르트의 집에 머무르며 조카들을 돌보았다. 심지어 형부의 임종을 지킨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형부가 죽은 후 10년 넘게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피가 형부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모차르트가 <돈 죠반니> 작곡에 열중하던 1787년 5월 아버지 레오폴트의 부고가 전해졌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와 인연이 끊어진다. 같은해 말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에게 황실음악가 명칭과 함께 연 800 플로린의 급여를 지급하고, 황실에서 필요할 때 연주나 작곡을 의뢰하기로 했다. 그러나 살림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이기려고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랑에가 그린 콘스탄체의 초상화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너무 사치스러워 쪼들린 것이었다.  콘스탄체가 당시의 보통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사교모임을 즐기며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도 콘스탄체는 아들과 온천에 휴양을 갔다가 뒤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임종을 보지 못한다. 장례비도 없어서 모차르트는 성 마르크스 시립묘지 빈민구역에 묻히는데, 당시 빈의 장례식 풍습에 따라 가족과 친구들도 묘지 입구까지만 들어갔다가 궂은 날씨 때문에 돌아가버렸다. 큰 구덩이에 여러 구의 시체들과 함께 묻힌 모차르트의 주검은 묘지가 이장되면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하자 철없던 안방마님 콘스탄체는 억척 엄마로 변신한다. 유작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녔고,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돈도 벌고 여러 차례 황실에 연금을 요청해 결국 받아냈다. 콘스탄체는 오히려 남편 사후에 빚도 모두 갚고 어느 정도 여유있는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6년후 그녀는 남편의 팬이었던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만나 이듬해부터 동거에 들어가고 11년 후에야 공식적인 재혼을 한다. 그 사이 니센은 모차르트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 모차르트 전기를 쓴다. 1826년 니센의 사망으로 다시 미망인이 된 후에도 콘스탄체는 모차르트 선양사업에 힘쓰다 1842년에 죽었는데, 묘비에 콘스탄체 모차르트라고 새겼다. 

하이든이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면, 모차르트의 경우는 자신과 아내의 낭비벽 때문에 쉬지 않고 작곡과 연주를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콘스탄체는 철없이 사랑스럽고, 남편을 팔아먹는 악녀로 묘사되지만, 오늘날 모차르트의 작품이 이나마도 보존된 것은 그녀의 덕분이다.반면 하이든은 작품들의 저작권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귀속된 덕분에 거의 모든 작품이 멸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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