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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설의 조선검 김체건과 김광택, 일본·청에 검을 겨누다!

by 뉴스버스1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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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항거의 역사

김준혁 한신대 교수 

 

전설의 조선검, 김체건(金體乾)!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인(劍人)으로 불리는 김체건, 훈련도감 교관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전설의 조선검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의 아들 김광택은 영조의 호위무사이자 금위영 교련관으로 검선(劍仙)이라 불렸다. 검의 신선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 중인 무예제보 표지. (사진=김준혁)

김체건의 무예는 그의 아들 김광택에게 전수됐고, 김광택의 무예는 임수웅과 백동수에게로 전달되었다.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최측근 무사였고, 백동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최측근 무사였다.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다.

사도세자는 임수웅와 함께 1759년에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고, 정조는 백동수와 함께 1790년에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는 장용영의 기반 병서(兵書)로 신라의 『무오병법』(武烏兵法)과 고려의 『금해병법』(金海兵法)을 능가하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가 되었다. 그러니 김체건에서 시작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무예는 백동수에 이르러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조선 무예로 완성되었고, 장용영 모든 장교와 병사들의 무예가 된 것이다.

무예가 절묘한 김체건

그렇다면 먼 훗날 장용영을 창건하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김체건은 어떤 인물이고, 그의 아들 김광택은 어떤 인물인가? 조선의 협객으로 이야기되는 백동수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서 일반인들도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조시대 장용영의 초관(哨官·조선시대의 종9품 무관직)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김체건과 김광택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들이다. 

이 두 부자는 몇 년 전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에 나온 적이 있지만, 실제와 너무 다르게 그려져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두 부자가 조선의 무예사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체건에 대한 기록은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조와 정조시대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유득공의 아들인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 실려 있다. 그리고 관찬사서인 『숙종실록』과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기록인 『훈국등록』(訓局謄錄)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처럼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실체를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일단 이 모든 기록을 종합하면 김체건은 매우 훌륭한 애국자이자 역사상 빼어난 무예인이었다.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서는 그가 달리기에 능하며 민첩하고 무예가 절묘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숙종대에 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검보(劍譜)를 얻어 기예를 수련하였는데, 이후 숙종(肅宗)이 김체건을 불러 시험해보니 칼을 들고 하늘에 매달려 허공을 나는 듯 돌고, 땅위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데 실제 엄지발가락 하나만 세운 채 무예 시연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짧은 기록을 보강하는 기록들이 바로 『숙종실록』과 유본학의 『김광택전』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무예서인 무예제보.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 중인 무예제보를 필자가 직접 찍었다. (사진=김준혁)

유혁연, 왜구를 막는 방안을 찾다.

숙종이 즉위하고 나서 조선은 효종의 북벌론(北伐論)을 계승하여 요동(遼東)을 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주로 영의정 허적과 훈련대장 유혁연 그리고 중국에 대한 조선의 자주를 주장하던 백호 윤휴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의해 굴욕적인 삼전도의 치욕을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인물들중에서 가장 주체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었다. 

영의정 허적은 호방하기로 백성들 사이에서 알려졌고, 유혁연은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검술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예의 대가였다. 윤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저 주자의 학문만을 공부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던 어찌보면 조선 사대부중 가장 과격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력한 북벌론은 주장했던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아버지 현종대에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유지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남인(南人)과 연대한 정치를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남인들의 북벌론을 받아들였다. 이때 유혁연이 주목한 무사가 바로 김체건이었다. 

유혁연은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무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종 8년에 있었던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에 당시의 세력파이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된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탓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무인이었다. 그는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북벌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는 한편 경상도 해안가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에 대한 경계로 조선 전체 무사들의 실력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온 무예 동작.

당시 왜구들의 조선 해안가 노략질은 임진왜란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왜구들의 난으로 인하여 조선 조정은 엄청난 고통을 당했고, 이들과의 대결은 거의 전쟁 수준이었다. 그래서 유혁연은 숙종에게 일본 군사들과 왜구를 제암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예인 ‘왜검(倭劍)’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건의하였다. 『숙종실록』에 실린 기록이다.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에 모두 있는데, 일본이 가장 낫습니다. 우리나라만 홀로 전해 익히는 사람이 없어, (신의) 마음은 항상 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1인을 동래에 내려 보내 전하여 익히도록 하고자, 부사 이서우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형세를 살펴보라고 말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 답을 받아본 바 (검술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의 관리하에 배울 수 있는 1인이 있으니, 이 사람을 내려보내 검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좋다.”라고 하였다. 

이때 유혁연이 보낸 이가 바로 훈련도감의 군교(軍校) 김체건이었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당시 동래부사가 이서우였는데, 이서우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실제 조선후기 기호남인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스승이었다. 실용적 사고를 지난 이서우는 남인이었기에 유혁연과 밀접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이서우는 유혁연의 지시를 받아 몰래 동래에 있는 왜관으로 김체건을 잠입시킨 것이다.

김체건, 왜관으로 잠입하다. 

유본학의 『김광택전』에 보면 이때 김체건이 동래 왜관에 노비로 들어가 수 년에 걸쳐 왜관의 무예수련장 옆에 구덩이를 파서 몸을 숨긴 채 일본 무사들의 검술을 보고 익혔다고 한다. 

당시 동래 왜관에서 일본 무사들이 익혔던 검법은 신검술(神劍術)이라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무예였으면 신검술이라고 했겠는가? 일본 무사들은 이 신검술을 비밀리에 익히고 전수해서 도저히 조선의 무사들이 알 수가 없었고, 왜관에 있다 하더라도 일본 무사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수련하고 있어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체건은 낮에는 왜관의 노비로 일을 하고, 밤에는 비밀리에 파놓은 구덩이에 숨어서 무예를 관찰하면서 일본 무예를 익혔다. 

이 과정에서 김체건이 어떻게 해서 일본 무사들의 비밀 수련 장소에 구덩이를 파고 무예를 보고 익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훈국등록』(訓局謄錄)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혁연의 지시를 받은 이서우는 김체건을 왜관에 보내 무예를 익히게 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역관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일하는 김익하와 상의를 하였다. 김익하는 동래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훈도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동래 왜관의 일본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김익하는 그중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을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김체건을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훈련도감 관리청에서 보낸 300냥과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일본인을 매수하였다. 그 일본인이 김체건을 왜관에서 은밀히 보호해주고 일본인들의 비밀 무예수련장으로 안내해 준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특급 비밀첩보작전인 셈이다. 이렇게 일본인을 매수하여 익힌 왜검은 장차 조선의 병사들이 일본 무사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반으로 발전되었다.

‘척이지사’(斥弛之士)‘ 김체건

사실 김체건은 ‘척이지사’(斥弛之士)였다. ‘척이지사’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물로, 성격이 호방해서 호랑이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강호의 무사가 나라의 국방을 위해 자신의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몇 년 동안 왜관에서 노비가 되어 천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일본의 검법을 익혀 조선의 병사들에게 가르쳐 조선의 무사들이 다시는 일본의 무사들에게 패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로 그 힘든 시기를 참고 버티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일본에 대한 전 백성들의 분노가 대단했기 때문에, 김체건은 백성을 위하여 그 어려움을 참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에 대한 진정한 분노이자 항거가 아닐 수 없다. 김체건이 일본 왜관에 잠입하기 위해 사전에 김익하에게 일본어를 익히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왜관에서 돌아와 숙종 앞에서 무예 시연을 보이자, 보는 이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의 무예 시연에 대한 모습이 『무예도보통지』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유본학의 기록에 의하면, 김체건은 궁궐 마당에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 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가히 무협지에 나오는 전설의 고수를 보는 듯하다. 그의 무예가 이렇듯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동작.

김체건, 청나라 무예를 익혀 보급하다

김체건은 동래 왜관에서의 특별한 경험 때문에 청나라의 무예를 익혀 조선의 무사들에게 보급하는 일도 맡게 되었다. 경신환국 이후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된 김석주의 지시로 김체건은 김석주와 함께 청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에 가게 되었다. 김석주는 숙종 즉위 초반 남인의 실세인 허적과 유혁연, 윤휴와 함께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만들어 북벌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한족(漢族) 출신들의 반란인 ‘오삼계의 난’을 진압하고 안정되자, 김석주는 오히려 북벌론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북벌론자들을 역모사건으로 엮어서 죽이고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도체찰사부의 총사령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국방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김석주는 자신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행단에 김체건을 포함시켰고, 김체건은 비밀리에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무예를 섭렵하였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청의 무예를 중앙 오군영(中央五軍營)의 병사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중국과 일본을 거치면서 동아시아 3국의 무예에 정통했던 그가 인생 후반부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가 영조대 조선의 검선(劍仙)이라 불린 김광택을 낳았고, 그의 무예가 김광택에게 전수되어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되어 장용영 무예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아버지 김체건의 무예를 전수받은 김광택은 당대 도가(道家)의 대가인 김신선(金神仙)에게 추가로 수련을 받았다. 규장각 검서관인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 이야기하는 김신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암 박지원이 이야기한 김홍기나 이덕무가 이야기한 김홍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김홍기는 같은 김홍기인데,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고 한다. 김신선으로부터 몸을 가볍게 하여 나는 듯 빨리 걸어가는 일종의 축지법 같은 경신법(輕身法)을 배운 김광택은 그 또한 짚신 한 켤레로 금강산을 두 번을 오가고도 짚신이 닳지 않았다고 유본학은 쓰고 있다. 

현실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진정 내공이 극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본학은 김광택의 이야기를 아버지 유득공으로부터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유득공이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와 같은 백탑파(白塔派·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으로 이루어진 지식인 집단)였기 때문에 백동수의 스승인 김광택을 직접 보았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래서 유본학은 김광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도가의 인물로 덜 알려진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가 80세가 넘을 때까지 어린 아이의 피부 같았을 정도로 도가의 수행을 높이 한 인물이라며 세상 사람들이 도가의 신선 같은 이는 김신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김광택 역시 김신선만 한 도가의 대가라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로 표현되는 융릉 무인석.

김체건, 김광택, 무예도보통지의 근원이 되다

김광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체건의 모든 무예를 전수받았고, 그 과정에서 금위영 교련관의 역할도 하였지만, 관직에 있지 않고 은거해 있을 때는 명문거족의 식객으로 그들을 호위해주며 젊은 무사들에게 사적으로 무예를 지도해주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무사들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김광택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식객으로 있다가 1757년에 영조를 만나 금위영의 교련관으로 발탁되었다. 김광택은 홍봉한의 부탁으로 여러 젊은 무인들을 지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그의 최측근 무사인 임수웅일 것이다. 

홍봉한은 임수웅을 김광택에게 지도받게 하고, 사도세자는 임수웅과 함께 1759년 『무예신보』를 편찬하였고, 『무예신보』는 1790년(정조 14년) 무인군주 정조의 명으로 김광택의 제자 백동수의 시연으로 장용영 서국(書局)에서 『무예도보통지』로 간행된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김체건과 김광택 그리고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무예의 계보는 단순히 무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조시대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었다. 이들 무사들은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력을 이길 수 있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가 꿈이었다. 군사력이 약해서 일본과 청나라에 엄청난 수모를 겪고 수많은 이들이 죽고, 또 그들의 나라에 끌려가 노예처럼 살았던 것을 김체건과 김광택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세에 대한 항거의 정신으로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이루어냈다. 결국 아버지 김체건과 아들 김광택은 전설의 조선검, 또 검의 신선이라 불리며 조선을 지키기 위한 영원한 무장으로 오늘까지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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