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일본 근대화의 시작과 끝, 나가사키 (상)

by 뉴스버스1 2023. 3. 19.
728x90

하광용 에세이스트 

 

일본 vs 포르투갈 / 네덜란드 / 미국

덴츠 연수를 간 적이 있습니다. 3일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 도쿄 긴자에 있던 그 본사의 14층 교육장에서 도시락을 시켜 먹어가며 꼬박 수업에만 매달렸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광고대행사 오리콤과 덴츠 간에 업무 협약이 맺어져 입사 동기들과 함께 소위 선진 광고 기법을 배우러 간 것입니다. 덴츠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가장 큰, 아니 단일 광고회사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광고대행사입니다. 당시 오리콤은 직원 수가 300명 규모였고 덴츠는 6,000명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세계 7위권의 광고산업 국가이고 이노션, 제일기획 등 글로벌 마켓에서도 큰 손인 광고대행사를 보유하고 있기에 연수를 하러 덴츠를 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21세기 직전인 199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가 덴츠에서 받은 수업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덴츠가 제작한 TV CF나 인쇄 광고 등의 매체 광고보다는 프로모션 파트의 어떤 프로젝트였습니다. 덴츠는 도쿄 디즈니랜드는 물론 일본에서 가장 큰 테마 파크인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의 설계부터 건축, 개장, 광고, 운영 등 모든 것을 턴키로 수주하고 그 일을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이 당시 제 머릿속에 있던 광고회사의 업무 영역을 한참 벗어난 일이라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광고회사에서 그런 일까지 하다니라며 놀란 것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그 수업을 맡은 그 프로젝트의 팀장은 투자자 모집까지 대행했다고 한 것 같았습니다. 과연 부동의 세계 1위 광고대행사인 덴츠입니다.

덴츠는 하우스텐보스의 오픈 광고에 당시 할리우드의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를 모델로 등장시켰습니다. 강사가 수업 시간에 보여준 론칭 CF엔 해리슨 포드가 당시 인기를 끈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처럼 헬기를 타고 바다 건너 신기한 숲속의 마을인 하우스텐보스를 찾아가 그 테마 파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아이들과 함께 일본 여행 시 인기 방문지가 된 이 하우스텐보스는 네덜란드 마을을 콘셉트로 한 테마파크로 규슈의 나가사키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우스텐보스가 나가사키에 있는 것은 나가사키가 네덜란드와 상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네덜란드 마을을 콘셉트로 한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 전경 (출처, 하우스텐보스 홈페이지)

나가사키는 일본을 잘 모르는 우리에게도 도시의 사이즈에 비해 익숙하게 들려온 편입니다. 일단 먹는 것으로 나가사키 짬뽕과 나가사키 카스텔라가 떠오릅니다. 그런 이 도시가 네덜란드와 상관이 있는 것은 무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전국 시대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개창한 도쿠가와 막부는 그로부터 약 30년 간 그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어떤 사건을 정리하고 1643년부터 서양 상선이 일본에 입항할 때는 오늘날 도쿄인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나가사키 한 곳만을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그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독점적인 서양 파트너로 선정되고 활동했던 국가가 네덜란드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골머리를 앓게 한 사건은 아래에서 설명됩니다.

이때 막부는 관리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나가사키 앞바다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인 데지마를 만들어 그곳에 네덜란드 사람들을 정주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조치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거대한 흑선을 몰고 에도 앞바다에 출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막부는 미국과의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맺고 다른 항구들도 개항했는데 이로써 1643년부터 1859년까지 216년 간 나가사키에서만 지속되어 온 일본과 네덜란드 간의 밀월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위의 덴츠가 수행한 프로젝트인 하우스텐보스가 나가사키에 지어진 것입니다.

200년 넘게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양의 물자가 오가다 보니 나가사키는 일찍이 서구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서양의 상품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도자기와 우키요에 등을 비롯한 문화 상품들이 서양으로 나가서 유럽인을 열광시키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일본 문화의 바람이 분 자포니즘(Japonism)의 출발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나가사키엔 서양의 물자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진 문화와 학문들도 들어왔는데 이것을 통칭하여 난학(蘭學)이라 불렀습니다. 네덜란드를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 그 나라를 화란(和蘭)이라 불렀던 일본인이기에 그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가사키에 관광지로 복원한, 데지마 내에 있는 과거 모습을 축소한 미니 데지마 (출처, 나가사키 공식 관광 블로그)

난학은 동양의 우물 안 개구리인 일본인을 깨우쳐 이후 그것을 신봉한 선각자들이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게 한 주도 세력이 되게 하였습니다. 당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책임자는 1년에 한 번은 에도에 상경해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에게 인사를 드리고 프레젠테이션을 실시했습니다. 쇼군은 그 네덜란드인을 통해 1년간 변화한 서양의 정세에 대해 보고를 받은 것입니다. 쇄국정책을 실시한다고는 했지만 막부는 그렇게 네덜란드를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나가사키는 이렇게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되기 이전부터 서양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보듯이 그 창구는 네덜란드라는 서양의 국가가 전담하였지만 나가사키엔 그들보다 먼저 온 서양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서양 파트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이 생긴 1643년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543년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그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었습니다. 규슈 남단의 다네가 섬에 도착한 그들의 손엔 조총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6년 후인 1549년 일본엔 서양의 것이 하나 또 들어왔습니다. 조총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카톨릭이었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카톨릭 내 예수회를 창설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사제가 가고시마와 나가사키의 히라도시에 상륙해 일본 내 카톨릭의 전교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페인인이었던 그는 3년 후 중국 전교를 위해 일본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는 포르투갈 사제들이 일본에 들어와 선교를 하며 카톨릭을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가리키는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은 이 당시에 생긴 말로 그 어원은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탕(Cristão)입니다. 이렇듯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으로 상징되는 초기 이슬람교처럼 일본엔 1540년대 불과 6년 사이로 그 나라를 변화시킨 문명의 이기인 조총과 종교 사상인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루벤스, 1618. 일본에 카톨릭을 처음으로 전교한 예수회 신부.

조총과 기독교가 전파된 16세기 중엽 일본은 혼란스러운 전국 시대로 천하를 놓고 내전 중에 있었는데 그 당시 1차 승자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그는 일본 통일을 거의 코앞에 둔 상태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1582년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라 불리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두머리 사무라이답게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죽기 전 30여 년간은 조총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을 경험하였습니다. 일단 그는 서양에 굉장히 개방적인 인물이라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조총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그 위력을 알아보고 바로 그것을 받아들여 그 무기로 경쟁자인 적들을 물리치고 일본 통일을 향해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조총은 포르투갈인이 처음 전해준 이후 카톨릭이 들어온 나가사키의 히라도시 항을 통해 대량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조총의 자체 개발에 성공하여 그것은 일본 군대의 주력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총의 성능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그가 죽은 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조총이 있었기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전해준 조총. 일본은 이를 지속적으로 개량해 성능을 높임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조선의 선조는 오늘날 나가사키 현인 대마도의 도주 소 요시토시가 그에게 선물로 가져온 한 무기를 대하고 있었습니다. 조총이었습니다. 입회한 병조판서 정탁은 그 총을 시험이라도 해보자고 선조에게 고하였지만 왕은 왜인이 가져온 것이고 역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물건이라며 그의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다 건너 조선에 처음 건너온 조총은 격발 한 번 못해보고 바로 군기사라는 무기 창고로 직행하였습니다. 그때 발사라도 한 번 해봤으면 임진왜란 개전 초기 조선의 병사들이 무모하게 조총 앞으로 달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 대한 다른 묘사로는 입회했던 신립 장군이 선조 앞에서 조총과 화살 발사를 비교 시연하며 조총이 재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려 화살보다 못하다며 왕을 안심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총 한 발을 쏘는 동안 화살 세 발로 그 사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단점을 보완한 개량된 조총과 전술로 임진왜란에 임했습니다. 위의 일화는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다시는 일본에 당하지 않겠다는 심경으로 썼을 법한 <징비록>에 나오는 이야기로 신문명인 신무기를 대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징비록>은 전후 그것이 쓰인 피해자 조선에서보다 가해자인 일본에서 더 많이 팔리고 읽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은 물론 기독교에도 거부감이 없었기에 일본 내 카톨릭은 급격히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580년 기리시탄의 수가 1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교세가 커나갔으니까요. 지도자급인 다이묘들 중에서도 카톨릭을 믿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17세기 초엔 70만 명 가까이까지 신자 수가 늘어났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나가사키는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 내 카톨릭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신자 수에 있어서도 일본 전체 평균은 1% 수준인데 나가사키는 4.5%에 달할 정도로 많은 카톨릭 신자가 살고 있습니다.

※ 다음 주말 <하>편에선 일본 기독교의 탄압과 포르투갈이 일본 사회에 준 영향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세 번째 서양 파트너인 미국의 등장과 영향에 대해서도 쓰겠습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버스(Newsvers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