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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국을 위로한 베르디 vs 떠돌이 망명자 바그너

by 뉴스버스1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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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 8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 베르디 & 독일 음악극의 절대자 바그너'(4)

혁명(革命 Revolution)은 어떤 사회를 급격히 그리고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교체를 넘어서 이념적 변화로 인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시스템에 있어서 급격하면서도 근본적인 체제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대개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추구하는 변화는 개혁이라고 부른다. 혁명의 상황에서 합법과 비합법은 무의미하게 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기존 부르봉 왕조의 검사와 판사들은 상당수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대로 혁명에 실패해 반란분자가 되면 제도권력 전체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특히 권위주의 독재권력일수록 더욱 그렇다. 바그너도 당시 유럽을 휩쓴 혁명에 휘말렸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가장 많은 혁명이 일어난 해는 1848년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이해 조선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고, 다음 해 헌종이 승하하고 강화도령 철종이 즉위한다. 이탈리아에서는 2월 8일에 마치니가 이끄는 혁명군이 로마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2월 21일에는 세계사에 성경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책,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다. 바로 그 다음날에는 프랑스 혁명(1789) 후 복고된 루이 필립 왕정에 맞선 2월 혁명이 발발해 이틀 후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3월 13일에는 빈에서 혁명이 발발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구성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이자 빈 체제의 수장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었다. 이틀 후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헝가리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흘 후인 3월 18일에는 베를린에서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시위대의 요구에 굴복해 자유주의 내각을 수립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두달 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개원해 독일 통일 방안 논의를 본격화한다. 12월에는 후에 프랑스에 제2제정을 여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야말로 격동의 한 해였다.

혁명에 휘말려 망명자가 된 바그너

드레스덴의 궁정악장(Kappellmeister)이 된 바그너는 원래 버릇대로 수입 이상으로 돈을 쓰기 시작했다. 사설 도서관을 지어 엄선한 고금의 문학서적으로 채웠다. 나중에 쓰는 음악극 소재도 모두 여기에서 얻는다.

<탄호이저>는 1845년 10월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바그너는 홀로 대본과 작곡을 완결할 때에만 자신이 오페라에서 추구하는 의미를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날카로운 비평가였던 슈만은 1846년에는 하인리히 도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평가했다. “독창적인 작품으로 몇 군데는 어색하지만 전작들보다 100배는 좋다네. 어쩌면 바그너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려는 의욕도 확실해 보여.”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중 순례자의 합창 장면

바그너가 1846년 4월 축제에 공연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유가 생긴 그는 <로엔그린>(Lohengrin)의 초안을 썼고 2년 후 완성했다. ‘로엔그린’을 작곡하면서 바그너는 독일의 전설과 그리스 신화에 심취했고 또 좌익 신문에 정치적인 기고를 몇 편 쓰기도 했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바그너는 궁정 오케스트라와 국립극장의 개혁안을 차례로 극장장 뤼티차우에게 제출하는데, 둘 다 위기를 느낀 관계자들과 관료들에 의해 좌절된다. 바그너의 불만과 에술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바그너는 이런 기득권과 결탁한 반동세력을 변화시켜야만 자신이 바라는 예술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848년 1월 라이프치히에서 어머니가 사망하여 다른 가족들과 연결된 유일한 고리가 끊긴다. 바그너는 1848년 4월말까지 <로엔그린> 작곡에 매달려 유럽 전체에서 벌어진 봄의 혁명들을 지나쳐 버린다. 

그해 3월 베를린 봉기 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왕이 작센에 진보적인 정부를 세우겠다고 한 약속을 믿은 바그너는 5월에 작센 독립극장을 세울 계획을 올렸으나 거절당한다. 왕의 약속은 기만전술에 불과했으며 속았다고 생각한 바그너는 6월에 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인 ‘조국 협회’에 입단했다. 거기서 공산주의보다 입헌군주제를 찬성하던 중산층 진보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연설을 한 것이 알려졌는데도 궁정악장 직책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바그너는 이 시기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기획안을 완성하고 대본의 일부를 썼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정치참여가 많아진 바그너가 의무에 불성실하게 되자, 뤼티차우는 사전에 아무런 말 없이 모든 공연준비를 마친 <로엔그린>을 취소해버린다. 바그너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그 순간부터 나는 드레스덴의 극장과 극장에 대한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운명의 1849년 3월이 왔다.

지난해의 베를린 봉기의 결과로 성립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통일독일의 왕으로 프로이센 왕을 추대하기로 결의하는데, 시큰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결의를 거부했다. 작센 역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제정한 헌법을 무시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폭동의 가능성을 감지한 왕은 프로이센에 군대를 요청한다. 드레스덴 봉기의 임시정부에 참여한 바그너는 민병대 모집 전단에 글을 썼다. “병사여! 너는 외국 군대에 맞서 싸울 민중의 편이다!” 급조된 민병대는 프로이센 정규군과 상대가 안됐고 허무하게 진압 당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를 그린 목탄화.

주도자 색출이 시작되자 도주하던 바그너는 임시정부 일행과 떨어지는 바람에 다행히 체포를 피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바그너는 바이마르(Weimar)로 갔고 그곳에서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도움으로 거처를 얻는다. 바그너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을 안 바그너는 부인 민나를 남겨둔 채 리스트에게 약간의 여행비를 받아 스위스로 떠난다. 

이때부터 11년간 망명 생활을 하게 된 바그너는 1849년 5월말 취리히에 도착해 알프스와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하여 그곳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곳 사람들의 뜻밖의 환영도 정착의 이유가 되었다. 친구 우흘리크에 이렇게 편지에 썼다. ”놀랍게도 나는 여기서 이미 유명인이라네. 내 오페라 전곡이 음악회용으로 편곡되어 자주 공연되었다는군. 세상에.” 이후 바그너는 스위스에서 23년간 살면서 그의 대표작들을 썼다. 

바그너는 새로 스위스 여권을 발급받아 파리를 방문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불친절한 곳이었고 실망만 남긴 채 7월에 다시 취리히로 돌아가 ‘예술과 혁명’,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두 편의 글을 쓴다. 이 두 글은 1850년대에 바그너를 신예술의 선구자로 각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바그너는 요란한 치장과 볼거리에만 급급해서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 극장에서 멀어진 당시의 극장을 비판하고,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시, 드라마, 음악, 춤 등의 모든 요소가 민중(das Volk)에 의해, 민중을 위해 하나로 통합되는 ‘총체예술작품’(Geamtkunstwerk)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명자 바그너가 살던 스위스 취리히의 거리

1849년 가을 민나가 취리히에 도착해 파리에서의 성공을 졸랐다. 이듬해 친구 칼 리터(Karl Ritter)의 아내 율리(Juli)가 그의 주거비로 연간 800달러의 후원금을 주겠다는 기쁜 소식이 왔고 이 후원은 1859년까지 지속됐다. 그녀와 친한 사이로 언젠가 드레스덴까지 바그너를 만나러 왔던 젊은 여인 제시 롯소(Jessie Laussot 1826~1905) 역시 좋은 소식을 보내왔다. 그녀는 보르도의 부유한 와이너리 가문의 부인이었는데, 매년 2,500프랑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젊은 부인과 바그너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눈치챈 남편 외젠이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멀리 프랑스의 서해안 끝자락 보르도까지 방문해 후원을 확정지으려 했던 바그너는 쓸데없는 애정행각으로 적지 않은 후원을 날리고 민나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파리로 돌아온 바그너에게 파리는 여전히 냉담했고 바그너는 건강이 나빠졌다. 그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한 음악 베르디

베르디는 1844년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과 <에르나니>의 성공으로 1만2,000 리라를 벌고 1847년 <아틸라>와 <맥베스>로는 1만8,000리라를 벌었다. 이해 리코르디(Ricordi) 음악출판사와도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서 상당한 부를 쌓았다. 그는 고향 근처에 집과 큰 농장을 마련해 부모님을 모셨고 부세토의 카발리 궁전까지 사들였다. 1848년에는 빌라 베르디(Villa Verdi)로 알려진 부세토 근처 산타가타(Sant'Agata)에 저택을 짓기 시작해 3년후 완공 입주해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베르디의 저택 빌라.

1843년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1848)가 음악 감독을 하던 빈을 포함해 베네치아, 나폴리 등에서도 <나부코>의 성공에 이어 후속작들의 공연이 줄을 이었다. <레냐노의 전투>까지 이탈리아 전역에서 베르디 작품을 공연하지 않은 도시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1844년에는 장인 바레치의 또다른 후원 수혜자인 무치오(Emanuele Muzio)를 유일한 제자이자 수행비서로 받아들여 오랜 기간 친밀하게 지낸다. 1846년경 <나부코>의 히로인이었던 쥬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전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어 밀라노로 돌아온 후 베르디의 조언자 겸 때때로의 비서, 후원자의 역할을 하다 파리로 넘어간다. 그때 그들은 편지로 속삭이고 있었다.

1847년 베르디는 런던을 방문해 7월에 <강도들>(I masnadieri)을 직접 지휘해 상연했는데, 이 자리에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가 참석했고 갈채를 받았다. 한때 쇼팽과 섬씽이 있었던 스웨덴 출신 소프라노 제니 린드(본명은 Johanna Maria Lind 1820~1887)에게 감동한 여왕은 그녀를 영국으로 귀화하라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창 나이인 29살에 오페라가수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애국적 오페라들 때문에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제국경찰의 감시대상이 된 베르디는 1849년까지 파리를 주무대로 삼았다. 1847년 <롬바르디아인>을 각색해 파리 오페라에 올린 베르디는 공연의 성공으로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기사훈장(the Order of Chevalier of the Legion of Honour)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도 혁명의 영향이 미쳤다.

1848년 3월의 밀라노 봉기로 오스트라인들이 일시적으로 밀라노에서 밀려날 때 대본작가 피아베(Piave)가 산마르코 공화국(Republic of San Marco) 수립에 참여했다는 소식에 격려의 편지를 썼다. 정치적 성향이 강해진 그에게 시인 쥬스티(Giuseppe Giusti 1809~1850)가 그를 일깨웠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이탈리아 국민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이지,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네.”

그는 1849년 1월 로마에서 <툴루즈 전투>(La Bataille de Toulouse)를 초연해 쥬스티의 조언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로마는 짧은 공화국 기간이었는데, 이미 <레냐노의 전투>가 초연되어 환영을 받은 바 있는 곳이었다. 

리골레토의 원작자 빅토르 위고의 초상화. 레미제라블의 저자이기도 하다.

1849년 7월 베르디는 쥬세피나 스트레포니와 이제는 확실한 커플이 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콜레라의 확산으로 인해 고향 부세토로 가서 <루이자 밀러>(Luisa Miller)를 완성한다. 베르디는 1851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La Fenice)극장에서 빅토르 위고의 <환락의 왕>(Le roi s'amuse)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를 발표해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다. <스티펠리오>(Stiffelio)는 실패했지만, 그는 극적인 드라마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데 평단과 타협하지 않았다.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너무 중독적 멜로디 때문에 공연도 하기 전에 퍼질까 봐 초연 당일에야 악보를 나눠주고 테너 주역가수는 별도로 분장실에서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쥬세피나 때문에 한때 부모와도 절연하는 등 가족문제의 갈등이 있었지만, 1849~1853년의 기간 동안 베르디는 위에 언급한 작품들 말고도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와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등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히트를 기록하는 걸작들을 생산해냈다.

라트라비아타의 원작자 알렉상드르 뒤마의 초상화.

파리 오페라를 위해서는 프랑스식 그랜드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기도>(Les Vêpres Siciliennes)를 계약했다. 이 계약을 위해 1852년 2월 파리를 방문했을 때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er Dumas fils)의 연극 <동백꽃 아가씨>(The Lady of the Camellias)를 보았고 나중에 <라 트라비아타>로 만들었다.

사실 로마에서의 초연은 실패했지만, 베르디는 당시로선 초현대적인 작품의 성공을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고 확신했다. 당연하게도 재공연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렇게 로맨틱한 작품들을 연이어 생산해내느라 바빴던 베르디는 일견 정치로부터 멀어진 듯 보였으나, 이탈리아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독립과 통일의 상징으로 떠오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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