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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순결한 좌파, 현실과 역사를 응시하다 - 이상호 작가

by 뉴스버스1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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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택 칼럼니스트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상호 작가는 2022년 8월,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 <이상호, 역사를 해부하다>에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출품하였다. 

친일부역자 92명 모두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이 채워져 있다. 등장 인물들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군인·경찰·관료·언론·문화예술 부문에서 간추렸다. 박정희·노덕술·방응모·김성수·김기창·김은호·최남선·이광수·서정주·안익태·김활란·백낙승·전봉덕·우범선 등이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 한지에 채색, 240×417cm 2020

이상호는, 해방직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정치적 와해로 처벌을 피해간 친일 부역자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았다면 이러한 모습으로 법정에 섰을 것이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초상화 기법으로 의습(衣習)을 간단한 선으로 처리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들어선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등용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2021년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이 작품은 1995년에 제작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발전시킨 것이다. 전시에는 1980년 5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산화한 열여섯 열사를 그린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도 냈다. 이상호는 “이 열사들로 인해 광주는 역사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양심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상호는 1979년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입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1980년 5월 동국대 목포 향우회 멤버로 ‘서울의 봄’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서울 돈암동의 세든 화실 건물에서 ‘산’의 작가 박고석(1917~2002)을 만나기도 했다. 

광주로 돌아와 조선대에 눚깎이로 입학하면서 5.18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84년에서야 1학년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교회에서 노동 야학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판화를 가르쳤다. 이때 표정두(1963~1987. 3)도 만났다. 

이상호는 대학 미술패 ‘시각매체연구회’(이후 ‘땅끝’으로 개편)에서 학내외 투쟁에 필요한 판화, 걸개, 플래카드, 포스터, 만평 등을 제작, 미술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6년 시위중 체포되어 광주 동부 경찰서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한 끝에 첫 발병 되었다.

형사는, “느그 집안은 웃겨븐 집안이구나~ 느그 아버지는 전두환 뽑아놓고 너는 전두환 물러나라고 하냐?” 며 빈정댔다. 이상호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전남 영암에서 주조장을 하는 아버지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시대의 부조리와 작가 내면의 부조화가 중첩되었다. 

1987년 4학년, 서울 그림마당 민에서 <민중해방과 민족통일 큰 그림 잔치>에 전정호와 함께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출품하였다. 

스패너를 쥔 노동자는 미국의 성조기에 불을 붙여 태우고 있고 낫을 든 농민은 성조기를 찢고 있다. 그림 가운데 백두산 천지에 서 있는 미륵동자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머리에 방뇨하고 있다. 

그림 전면에는 6월 항쟁과 민주화 투쟁, 탄광노동자, 물고문 받는 운동가, 미국의 미사일 등이 그려져 있다. 화면 가장자리를 장식한 꽃은 진달래이다. 미륵동자와 진달래는 이상호가 판화 〈통일염원도, 1987>에서 그린적 있는 도상이다. 

백두산의 산자락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캔버스에 아크릴, 260×650cm 1987 (이상호, 천정호 공동 작업, 2005년 복원)

그림을 순회 전시하던 8월, 광주 화실에서 체포되었다. 서울 종로경찰서 대공과로 압송돼 성동경찰서 유치장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고무‧찬양과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였다. 이후 눈을 가린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수사관이 욕조를 가리키며 “여기가 박종철이 죽은 곳이다. 너, 빨갱이지!”라며 협박하고 폭행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소지(청소등 잡무보는 수형자)가 “너 가짜로 미친척 하는 거지!” 하면서 또 폭행했다. 이상호는 형무소 병사동, 서울 시립 정신병원을 거쳐 전남 나주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냈고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 법통’과 ‘경제 민주화’가 새로 들어갔다. 체제 전환 시기에 드러난 경찰의 권력남용과 과잉충성과 같은 흐름은 권경원의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 / 2017년 제작>에도 드러나 있다. 

그만 좀 쫓아와라 고무판화, 23×30cm 1987

1987년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사실상 군사정권이 이어졌으나 국민들은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었다. 1990년 3당 합당은 총선 민의를 무력화시키며 거대보수여당을 탄생시켰다. 

1989년 졸업 작품으로 권력해부도를 만들었다. 화실에서 집필중이던 이철규(1964~1989. 5)가 자료를 찾아주었다.

1991년 봄,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생들을 정권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명지대 강경대를 시작으로 성균관대 김귀정까지 20~30대 11명의 청춘이 줄줄이 스러졌다.

국가권력은 ‘죽음의 배후가 있다’며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만들어냈다. 검사 9명을 동원하여 소위 ‘배후 세력’ 색출에 나서 민주질서 회복을 요구하던 분신 정국의 흐름을 패륜 집단에 대한 응징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상호는 2~3년에 한 번씩 입원 치료를 받아야했다. 병원에서는 환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책을 읽으며 지냈다. “정신병원은 한 번 그리고 나면 그릴게 없다”고 말한다.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묶인 환우, 24×16.6 cm 종이에 연필 2005

이상호는 이후 이철규 의문사, 이라크 전쟁 반대,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반대 투쟁 등에 쓰이는 걸개 그림, 포스터 등을 만들었다.

경찰 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상호의 심신을 달랜 것은 불화 그리기이다. 1993년 12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의 <고려, 영원한 미>전을 관람한 뒤 불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목포 후배들과 작품을 보면서 화려한 색감과 세밀한 구성에 감탄하였다. 그 자리에서 모사 작업을 하였다. ‘진경시대’(조선시대 문화 황금기)를 작명한 최완수가 ‘보기좋다’며 칭찬하였다. 단청장 기능보유자 스님에게 밑그림 그리는 법만 배운 후 독학으로 탱화를 공부하였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민중미술 15년전>에 걸개 그림을 출품하였다. 1997년, 광주 선덕사 주지 스님이 법당 후불탱화를 주문하였다. 도심 사찰에 ‘조선 그림’(묵화)은 맞지 않는다면서 현대적인 불화를 원했다.

민주와 통일, 고승(高僧) 초상, 인간의 생로병사를 담은 에스키스를 내었고, 승인이 난 뒤 본격적으로 후배들과 작업에 들어갔다. 고려불화 방식을 차용, 황토와 쪽물들인 비단을 판넬에 씌우고 석채와 분채, 금을 사용하였다.

선덕사 후불탱화 비단에 금분 채색, 360×410cm 1997
 

그가 그렸던 걸개 그림 표현 기법은 불화와 유사하다. 상단의 부처님 세상과 중단과 하단의 사바 세계 등 3단으로 표현하는 불화 장면이 걸개 그림에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걸개 또한 불교의 괘불(掛佛)에서 유래한다.

2021년에는 선덕사에 추가로 지장 탱화 작업을 하였다. 스님이 천도재에서 망자의 눈을 감겨주는 장면 등을 그려넣었다.

2001년 임곡 광재원 포교당 약사여래 후불탱화 역시 고려불화 양식을 차용하였다. 옛 것을 그대로 흉내만 내어서는 의미가 없다보고, 화면 하단에 동시대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다. 한의사가 침을 놓는 장면, 할머니가 손자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 사물놀이 등을 표현하였다. 2005년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복원했다.

광제원 약사여래도 비단위에 금분채색, 210×269cm 2001

2006년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신흥사 산신각 탱화 작업을 하였다. 쪽물 들인 비단에 금니로 그렸다. 불화 작업에 제한이 없었다. 사찰에서는 작가의 작업 스타일을 미리 알고 주문하였다. 

55세 되던 2015년에야 첫 개인전, <역사의 길목에서>를 가질 수 있었다. 30여년 동안의 작업을 장르별로 구분하였다. 

2018년 5월, 광주 무각사에서 '연필로 그린 부처님 이야기' 전시를 가졌다. 연필 작업뿐 아니라 유채 작업도 포함시켰다. 사찰 봉납 작품은 제외하고 이미 소장된 불화들만으로 전시를 가졌다.  

이상호는 팔상도(八相圖)를 4B연필로 종이에 모사했다. 팔상도는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모태에 입태되는 상인 도술래의상과 모태에서 출태하는 탄생을 뜻하는 비람강생상 등을 말한다.

지옥도 한지에 채색, 173x126cm 2010

이상호는 고려불화를 차용한 화법을 특징으로 한다. '지옥도', '약사여래도’ 등에서 민초들의 삶을 탱화의 하단에 섬세하게 묘선으로 그려내었다. ‘지옥도’에 나타난 업경대(業鏡臺)는 죽은 이의 죄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미군에게 삶을 짓밟힌 민간인의 모습이 담겨있다.

혹자들은 이상호를 향해 “80년대 의식을 못벗어났다”고 말한다. 이상호는, “나는 80년대 의식을 안고 산다”고 즉답한다. “이철규, 표정두 내 후배들이 죽어갔는데 80년대 의식을 버릴수 없다” 그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살아있는 내가 망월동 동생들에게 면목이 서야 되잖아요”

1990년대 초반까지 광주의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던 시인 임동확은 이상호를 말한다. “좌파·진보의 극점에 서 있다. 물고늘어질 정도의 고집과 진정성이 있다. 다른 이들이 모두 판을 떠났음에도 곁눈질하지 않는 순결주의자이다”. “우파·보수에서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예술로 이데올로기를 지워가는 작가이다.”

좌파와 우파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옳으냐 그르냐, 정의로우냐 정으롭지 않느냐의 패거리, 진영 시각으로 대입할 수 없다. 

서구 사상사에서 사회적(경제적) 평등에 대한 태도에 따라 좌파와 우파를 구분한 이는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 ~2004)였다. 저서 <우파와 좌파, Destra e sinistra(Right and Left), 1994>에서 그는 더 많은 평등을 원하는 그룹을 좌파로, 평등을 부정하지 않되 사회가 불가피하게 계층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그룹을 우파로 파악했다. 궁극적으로 불평등은 문화적 통합마저 훼손한다.

임동확은 이상호가 구속된 1987년에 5.18을 다룬 자신의 첫 시집 <매장시편>을 간행하였다. 임동확은 최근 출간한 산문집 <시는 기도다>(푸른사상)에서, 1980년 5월의 비극이 공허한 언어 사태 속에서 휘발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와 염려를 표명하였다. 

이상호의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은 동학으로 옮겨가고 있다. “명망을 위한 그림은 결코 아니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그림을 찾다보니 동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동학에 대한 인식도 명확하다. “동학은 최초 반봉건이 기치였으나 청일 전쟁(1894~1895) 때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면서 반외세로 전환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식사. 종이 위에 채색, 70×120cm 1994 

작가로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동학사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상의 발아가 어떻게 혁명까지 갔는지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황룡강, 우금치 전투 등의 전쟁화와 더불어 사상을 형상화하고 싶다고 한다.

역사학자 이이화(1937~2020)의 <동학농민혁명사> 1,2,3권을 독파한데 이어 전남 보성 불이학당에서 금년 1월부터 시작한 2년 과정의 동학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이상호는 역사화만큼 교훈적인 게 없다고 본다.

나름 근현대사를 일곱 부문으로 나누었다. 1. 의병~동학 2. 일제강점기 3. 해방과 분단 4. 박정희, 유신 5. 전두환, 5.18과 6월항쟁 6. 촛불 7. 통일. 향후 작업 기간을 12~15년 정도로 잡고, 이의 완수를 위해 자신의 고달픔을 달래주던 담배를 끊었다. 

이상호 그림은 그의 삶처럼 어떠한 장식도 없다. 이상호 류의 그림을 ‘민중미술’로 범주화하는 이론가들의 대상에 꾸겨 넣어지지도 않는다. 그의 역사화 작업은 감로탱(甘露幀) 형식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감로탱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의 천도를 위한 불교 행사 수륙재(水陸齋)에 거는 탱화이다.

“권력이란 역사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배를 선택해서 갑판으로 올라가 돛을 올려 나아가는 거라고요”<영화 ‘아웃로킹’의 대사중>

감기기운 있는 자화상 - 화장실 거울 앞에서 28×14cm, 종이에 연필 2007

이상호는 서슴없이 예술이라는 배를 선택해서 갑판으로 올라가 걸개 그림을 돛삼아 나아가는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다. 

정치 권력과 돈을 쥔 권력자들은 글과 그림으로 시대를 기록하는 예술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상호는 글보다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온 몸으로 그리고 있다. 

2022년 전시를 기획한 이나바 후지무라 마이(광운대 교수)의 해석은 명쾌하다. “(이상호 작가는) 역사라는 큰 몸을 잘라서 안에 들어가 있는 환부를 꺼내가지고 그것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그림으로 그린다. 그 환부가 어떻게 지금 현재와 연결되어 있는지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호는 지금도 1980년대와 달라진 게 없다고 본다. 강대국의 각축속에 놓인 한반도의 현실,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한 변화되지 않는 세상의 본질을 지금도 그리고 있다. 이상호 작가에게 미술은 영혼의 투쟁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5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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