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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헌 의원이 된 베르디 vs 스캔들 끝에 사면된 바그너

by 뉴스버스1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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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프레너미 시리즈 8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 베르디 & 독일 음악극의 절대자 바그너'(5)

19세기 유럽 열강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룬 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600년을 이어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신성 로마제국의 허울을 유지하며 중부유럽 핵심부를 지배하는 강자로 버티고 있는 가운데, 독일은 아직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 역시 교황령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북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는 남부, 베네치아 중심의 자치공화국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나라는 혁명과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1848년 혁명의 물결은 이 두 나라에도 밀어닥쳤고, 젊은 혁명세력은 피해만 입은 채 물러나야 했지만 혁명의 에너지는 다른 쪽으로 분출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프로이센 중심으로 뭉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추진하게 되었다. 남쪽의 이탈리아는 사르데냐 섬과 반도 본토에 일부 땅을 가지고 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이 커졌다.

이름 때문에 애국의 상징이 된 베르디

파리를 본거지로 삼아 3년간 활동했던 베르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협이 줄어들자 1856년 이탈리아로 귀국해 산타가타의 빌라 베르디로 귀환했다. 1853년부터의 11년간 베르디는 총 16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귀국 첫해 그는 빌라 베르디를 재건하고 말들과 농장을 돌보는데 전념하느라 작곡을 쉬었다. <시칠리아의 저녁기도>가 망한 탓에 생긴 위장병으로 인한 불편함도 있었지만 고향과 집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베르디가 실망을 달래고 있던 시간에도 베르디의 작품들은 공연을 쉬지 않았다. 1857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시몬 보카네라>(Simon Boccanegra)가 초연되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파리에서는 <일 트로바토레>의 그랜드 오페라 버전을 올리게 된다. 이 즈음부터 베르디는 쥬세피나를 비로소 부인이라고 불렀고 그녀도 편지에 베르디 부인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초상화.

나폴리 오페라극장을 위해서는 구스타프 3세 국왕의 이야기로 <가면무도회>(Un ballo in maschera)를 계약했는데, 검열당국이 자꾸 문제를 삼자 베르디는 분노해 나폴리와의 계약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검열과 예술가의 표현한계를 놓고 싸우던 베르디는 로마 오페라로 옮기면서 원제인 <구스타프 3세>를 <가면무도회>(Un Ballo di Maschera)로 바꾸기로 합의한다. 

베네치아와 나폴리, 로마를 거쳐 1859년 3월 산타가타로 귀환하던 베르디 부부는 6,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이 제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가까운 피아첸차(Piacenza)에 기지를 세웠음을 목격했다. 이미 1848~49년의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르데냐-피에몬테(Sardegna-Piemonte) 왕국만으로는 통일역량이 부족했으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지원하기로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북부 롬바르디아의 청년들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군에 입대하자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무장해제령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이탈리아인들은 전쟁을 선언했다. 

1차 독립전쟁에서 물러나 와신상담하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le II)는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끌고온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1859년 5월과 6월 병력이 3배인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뒀다. 프로이센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의 설계자 카밀로 카보우르(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1810~1861)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직접 만나 휴전에 합의해버린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설계자 카보우르의 초상화.

이미 중부 이탈리아에 진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군은 옛 지배자들을 복귀시킬 의사가 없었다.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인들을 핑계 삼아 조약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넘겨버렸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군주들을 축출한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의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은 1859년 12월 교황령의 로마냐 지방과 함께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결성했다.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는 주민투표를 통해 1860년 3월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를 합병하였다. 

1860년 10월 시칠리아섬과 나폴리가 주민투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군이 점령한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 역시 11월에 주민투표를 통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다.

1861년 3월 토리노(Torino)에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이 선포되고 초대 국왕으로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추대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기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알베르토 헌법(Statuto Albertino)을 채택하고 의회를 구성하여 국민 주권적 원칙과 군주적인 전통을 융합시켰다. 이탈리아 왕국은 1866년 10월 베네토 지방을 넘겨받아 주민투표에 의해 합병하고, 1870년 로마 입성을 끝으로 마침내 통일을 완성했다. 

베르디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로 생각한 것은 1859년 즈음이었다. <나부코>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이탈리아인들에게 거의 국가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제1차와 2차 독립-통일전쟁의 중심 인물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다. 통일운동을 하던 이들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이탈리아의 왕”(Vittorio Emanuelle Re d‘Italia)이라는 구호를 외치자 이 단어들의 첫 글자를 모으니 VERDI가 되었다. 비바 베르디(Viva Verdi)는 음악가 ‘베르디여 영원하라’인 동시에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이기도 했다. 이렇게 베르디는 음악뿐 아니라 그 이름에서도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의 슬로건이 되었다. 베르디 자신도 이것을 은근히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1859년 처음 주의회 의원이 된 베르디는 토리노에서 국왕과 통일의 설계자 카보우르를 차례로 만났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861년에는 3월 카보우르의 후원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이 의회는 바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제헌의회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카보우르가 그해 타계하자 베르디는 실망해 의회에 잘 출석하지 않고 본업인 음악활동으로 돌아갔다. 국회의원 베르디의 작품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은 임기중인 1862년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1874년 그는 다시 한 번 상원 의원으로 지명되었지만 이미 정치 참여의 뜻을 버린 후였다.  

파르마 오페라극장이 공연한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스캔들 속 망명자 바그너

망명자 바그너가 취리히에 정착한 후인 1850년 8월말 드디어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지휘로 <로엔그린>(Lohengrin)이 초연된다. 공연은 성공했지만 바그너는 친구였던 에른스트 베네딕트 키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존의 극장에서 자기 작품을 공연하는데 한계를 느꼈으며, 자신이 직접 설계한 전용 극장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1851년 바그너는 3년전 구상했던 <니벨룽의 반지>를 완전한 4부작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바그너는 여름에 쓴 ‘친구들과의 대화’라는 글에서 낭만주의 오페라의 한계와 신화 드라마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나아가는 이유에 대해 제시했다. 웅대한 구상을 들은 리스트는 어쩔 수 없이 4부작으로 커졌다는 설명을 듣고 이렇게 바그너를 격려했다. “기왕 하려면 후세 사람들이 보면서 ‘저런 놀라운 일을 하다니 당시 사람들은 미첬었나 보다’라고 할 그런 작품을 만들게나. 세비야 대성당도 처음엔 다들 미친 짓이라 했지만 결국 세워졌다네.”

바그너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비단상인 오토 베젠동크.

새로운 종합예술을 추구하는 바그너에게 후원자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낭독회를 마친 그는 1852년 2월 실크 사업으로 성공한 오토 베젠동크(Otto Friedrich Ludwig Wesendonck, 1815~1896)를 처음 만났다. 큰 부자였던 그는 여러 차례 사치스런 바그너의 빚을 갚아줬다. 그에게는 젊은 아내 마틸데(Agnes Mathilde Wesendonck 1828~1902)가 있었는데, 바그너보다 15살 연하였던 그녀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후에 시인 겸 작가가 되었다. 

오토 베젠동크는 <리엔치>,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을 부분 발췌하여 연주하는 등 3회에 걸쳐 취리히에서 콘서트를 열 수 있도록 자금을 댔다. 그 마지막 공연은 바그너의 40세 생일이던 1853년 5월 22일이었다. 사실상 최초의 바그너 페스티벌인 이 콘서트 시리즈는 흥행으로도 성공했다.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지휘자로 유명해지면서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자, 후원금이 점점 줄어들었다. 덕분에 사치를 자제할 줄 모르는 그의 빚은 엄청나게 늘어 1854년에는 빚이 1만 프랑에 달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대작의 탄생을 위해서는 창조적 휴식이 필요하다며 여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1855년 1월에 바그너는 런던에서의 지휘 초청을 받고 영국에 갔지만 환경은 열악했다. 5개월 후 콘서트에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참석하여 <탄호이저> 서곡에 앙코르를 보내는 일도 있었지만, 5개월간 겨우 1,000프랑을 벌고 건강은 나빠진 채 돌아와야 했다. 1856년 막바지까지 바그너는 건강, 결혼, 재정이 모두 엉망이었다. 바그너는 만사가 귀찮아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1849년 봉기의 주동자 바그너는 아직 ‘요시찰인물’로 당국의 감시 목록에 남아 있었다. 1856년 5월 바그너는 ‘예술의 범위에서 벗어나 정치에 가담한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청원하는 서한을 왕에게 보냈으나, 법무부로부터 거부당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작을 완성하려면 평화와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치료 효과가 있다고 느낀 발리안트 박사의 물요법 치료소 근처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 <반지> 전체 출판권의 선매도를 시도했다. 그런데 브라이트코프&헤르텔(Breitkopf und Härtel) 출판사는 단돈 1,000달러의 기막힌 횡재 계약을 거절해버린다. 이 사건은 바그너에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오토 베젠동크로부터 취리히 교외의 저택에 딸린 별채를 제공받은 바그너는 1856년 봄에 이사해 ‘아쥘(Asyl)'이라고 부르며 작곡에 박차를 가했다. 리스트와 연인인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이 찾아와 머무르면서 조용하던 취리히를 파리의 사교계처럼 떠들썩하게 만들어 바그너를 방해했지만 작업은 계속되었다. 브라이트코프&헤르텔 출판사로부터 재차 <반지>를 거절당한 바그너는 그보다 공연이 더 손쉬운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부터 손대기로 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숨을 돌리고 대중들과도 연결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57년 9월에 제자인 27살 한스 폰 뷜로(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 1830~1894)와 19살 아내 코지마(Cosima Francesca Gaetana Liszt 1837~1930)는 취리히로 신혼여행을 왔다가 바그너의 초대로 아쥘에서 몇 주일 머물렀다. 한스는 <지그프리트>의 1,2막 악보를 초견으로 피아노를 연주해 바그너를 기쁘게 했다. 아버지 리스트에게 음악적 감수성을 물려받은 코지마는 바그너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그너보다 15살 어렸고 문학 재능이 많았던 연인 마텔데 베젠동크의 초상화

이 무렵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이미 예사로운 단계를 넘어섰다. 그는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 “평생토록 이렇게 행복한 사랑을 즐겨본 적이 없다네....가장 사랑스러운 이 꿈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싶을 정도라네”라고 고백했다. 1858년 5월 남의 가사를 쓰지 않는 바그너로서는 이례적으로 마틸데의 시 5편에 곡을 붙여 ‘베젠동크 가곡집’(Wesendonk Lieder)을 발표했다. 한번 불붙은 그들의 불륜은 민나와 오토 앞에서도 공공연할 정도였다. 

1858년 봄 베젠동크 부부가 이 일 때문에 말다툼을 하자 위기를 넘기려는 바그너는 며칠간 파리로 혼자 떠났다가 돌아온 후 마틸데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 스케치와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가로챈 민나는 이를 불륜의 증거라면서 바그너를 야단쳤고, 마틸데에게는 “내가 보통여자였으면 이 편지는 이미 당신 남편 손에 갔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 사건 직후 베젠동크 부부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민나는 요양원으로 갔다.

두달 후 여행을 마친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두 여자는 서로 미워하며 말도 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1858년 8월 아쥘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고, 민나는 드레스덴으로 따로따로 떠났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이를 눈치챈 작센 정부가 바그너를 체포해서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귀찮게 생각한 베네치아 경찰간부 안젤로 크리스피는 바그너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지만, 당국이 신경 안쓰도록 가짜 보고서를 보냈고 덕분에 시간을 번 바그너는 1859년 3월에 루체른(Lucern)으로 건너간 뒤 8월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했다.

이 작품을 파리에서 공연하고 싶었던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베젠동크 부부를 만난다. 그간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돈이 급한 바그너는 오토에게 호소했고, 오토는 <반지> 4부작의 판권을 각각 6,000프랑에 사들였다. 바그너는 공연 수입만 갖는다는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하고 1차 대금을 받은 후 1859년 9월 파리에 도착했고 곧 민나가 합류했다.

파리의 바그너 팬들은 환영했고 바그너는 매주 수요일 저녁 살롱을 열어 시인, 음악가, 예술가, 철학자들을 초대했다. 예술 토론을 주도하기도 하고 자신의 오페라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며 손님들을 즐겁게 해줬다. 1860년 1월과 2월에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Teatre Italien)에서 열린 바그너의 콘서트에는 베를리오즈, 마이어베어, 구노, 샹플뢰리, 보들레르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왔고 관객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피날레 '사랑의 죽음'을 그린 그림.

그러나 혁명적인 화성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에는 모두 웅성거리는 바람에 바그너는 ‘이 오페라는 틀렸구나’ 한숨을 쉬었다. 화려했던 이 콘서트는 그에게 1만1,000프랑의 적자를 가져왔지만, 프란츠 쇼트(Franz Schott)라는 음악 출판업자에게 <라인의 황금> 악보를 1만 프랑에 팔아 간신히 한숨 돌렸다. 그래도 궁했던 바그너는 오토 베젠동크에게 <반지> 미완성 부분의 선금을 요청해 받아 파리 생활을 이어나갔다.

바그너와 추종자들은 1860년 3월 나폴레옹 3세 황제로부터 <탄호이저>의 공연 명령을 받아낸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이를 지지하자 주프랑스 작센 대사도 왕에게 연락했고 외교적 압력을 느낀 요한 왕은 결국 4개월 후 바그너를 사면한다. 이 사면령으로 바그너는 작센을 제외한 독일의 어디라도 갈 수 있게 되어 11년 만에 바그너는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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